버러지에 대한 단상

  • 등록 2014.04.18 13: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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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제1924번째

영화 ‘어바웃 슈미트’를 보면, 볼품없이 나이 들어가는 은퇴한 노신사의 절망과 우울이 등장한다. 자신의 쓸모없음을 한탄하고 점점 밉상이 되어가는 그. 그런 노년을 변화시킨 건 먼 나라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받은 아이들의 편지다. 영화는 거기서 끝이 나지만, 그가 그를 행복하게 하는 ‘나누는 삶’을 살아가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인정받는 것, 쓰임이 되는 것 모두 중요한 행복의 조건일지 모른다. 그래서 ‘봉사’, ‘기부’, ‘나눔’같은 단어들을 실천하는 이들은 나눔의 기쁨을 알고 계속 하게 된다.

나도 열아홉 살에 처음 봉사동호회에 나가서 나눔의 행복을 맛본 뒤 틈틈이 봉사활동과 작은 기부들을 했었다. 꼭 드러내고 싶지도 않을 만큼 너무도 미약했던 활동들이어서 티가 나지도 않았지만, 여유가 생기면 승냥이처럼 나를 ‘봉사자’, ‘기부자’로 만드는 기회를 찾았다. 얼마 전 250km 요르단 사막 마라톤에 참가하면서도 그랬다. 내가 좋아서, 내가 행복하려고 떠나는 길에 ‘나만 행복할 수는 없지, 좀 더 의미 있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스마일재단의 많은 사업들 중 하나에 지원하는 캠페인을 벌인 거다. 1만km를 달려 1km당 만원씩 모아 1억을 기부한, 너무 멋진 사람 ‘션’의 사례를 보고 자극을 받기도 했다. 그처럼 유명인사가 아닌 나 같은 일반인이 기부 캠페인을 벌이기에 적당한 플랫폼을 찾는 일이 복잡했지만, 어렵지 않았던 모든 준비 과정이 짜릿한 즐거움이었다.

기부천사로 이미 어마어마하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션-정혜영 부부처럼, 나는 기부계의 ‘큰 손’이나 봉사 정신으로 똘똘 뭉친 ‘기부천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를 지적할 수 있을 만한 자격은 없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건 우리나라의 기부문화가 경제나 문화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막 마라톤에서 경험했던 것은 사막의 황량함이나 극한 마라톤의 처절함뿐만 아니었다. 전체 외국인 참가자중 10% 정도가 따뜻함을 나누려고 했고, 그들이 기부하기 쉽도록 만들어주는 재단과 기부 플랫폼이 전해 준 신선한 자극이 있었다. 그건 ‘즐거운 놀이로서의 기부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사막 마라톤 참가는 일생일대의 특별한 사막 마라톤 완주 경험과 함께 서툰 기부 캠페인 첫 경험으로 나름대로 의미 있게 마무리 되었다.

귀국한 뒤, 뜻하지 않게 인터뷰를 많이 했다. 학교 홍보팀부터 몇 군데 신문사와 라디오 생방송 인터뷰까지 했다. 굳이 알리고 싶을 만큼 대단한 일을 이룬 게 아니어서 쑥스러웠지만 거절조차 부끄러워서 인터뷰에 응했다. 굳이 가릴 일도 아니어서 당당했지만 가끔 내가 ‘봉사하는’, ‘희생하는’등의 수식어로 표현되는 건 심히 민망했다. 나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슈바이처도 아닌데다가, 지금껏 봉사라는 이름으로 했던 건 단지 ‘내가 행복하려고’하는 이기적인 이유에서 벌인 일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수식어는 민망함을 주는 걸 넘어서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기에는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렇게 당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남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인터뷰했던 내 기사가 네이버에도 나와서 신기해하고 있었는데, 얼마 없는 댓글 중에 악플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직설이 달렸다. ‘기부하고 싶으면 사막 마라톤 참가비, 항공료로 지원하면 될 거 아니냐’. 사실 맞는 말이어서 할 말이 없다. 내가 정말 그 사업에 간절히 지원하길 바랐다면 어떻게든 목표 금액을 마련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행복에 행복을 얹는 즐거운 기부문화의 한 장면이 되고 싶었을 뿐, 숭고한 의식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댓글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 비비 꼬여야만 했을까?

미약한 경험이지만 그런 뭉툭한 칼날을 맞고 보니 악플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버러지야 무시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가 되면 다른 거다. 인터넷에서 뿐만 아니다.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너무 쉽게 말 하고 마는, ‘악플다는 버러지 같은 것들’.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는,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사정없이 할퀴인다. 무책임한 말은 던지기 쉬운, 무거운 돌멩이 같은 건데 그걸 모른다. 구역질 나는 건, 언제였든지 몇 번은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란 사실.

일주일간의 사막 마라톤 마지막 날에는 골인 지점까지 가볍게 5km 정도만 달리게 된다. 그때 행복했던 레이스가 끝나감을 아쉬워하며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 중 하나인 법정스님의 ‘무소유’의 작은 문고판을 들고 읽으면서 걸었다. 밑줄 쳤던 한 문장이 새롭게 읽힌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설령, ‘행복이 보장된, 즐거운 놀이로서의 기부문화’가 정착되었다고 하더라도 애써 비비 꼬인 버러지는 있을 거고, 누군가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애써야 할지 모른다. 말들이 쏟아지는 어느 때든지, 부디 모난 흔적이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도록 부드러운 물결 같은 말들이 흘러나오기를.

정준오
경희대 치의학전문대학원 3학년

정준오 치전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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