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계속>
가을
가을은 벌써 왔는데 더위 먹은 후유증으로 내 감각체계가 그렇게 민감하지가 않다.
늦은 매미가 잠시 울고 조용해 진 사이 공간이 한산하다.
성깔 빠른 잎들은 벌써 헌신에 힘쓰고, 준비 중인 것들은 마른 냄새를 풍긴다.
긴 줄 알았는데 이젠 결실을 위한 충전이 필요한, 짧은 시간이 서둘러 필요하다.
영원은 짧은 희열 후의 잔해들로 만들어진다.
떨어짐(Fall)을 예견하는 건조한 냄새가 가을을 시작한다.
팽창에서 유지 또는 축소로 몸집을 바꾼다.
숲속에선 주고받는 것들만이 긴밀하게 살아가고 있다.
가을엔 영적, 육적인 시-공간이 더 넓어진다.
그리고 꼭 다음과 함께 가을의 전설은 흔적을 남긴다.
<가을을 탄다고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방어 시스템을 구축할 때쯤/심장이 메말라 낙엽처럼 가벼워 질 때쯤/황금들판이 시작되는 꼬옥 이맘때쯤/햇살이 빗겨 눈부신 오전 한가로운 때쯤/문득 반팔 사이로 새털같은 바람이 붙을 때쯤/있어도 옆엔 없고, 없어도 어딘가에 있는 그때쯤.
가을은 여름에서부터 잉태되었다.
낙엽은 계절이 한참 성숙되었음을 알린다.
갈수록 짧게 느껴지는 것은 나이에 대한 상대성이론 때문이다.
나무 사이가 점점 많이 보이는 것부터가 가을의 의미다.
같은 시간 산책로가 한산한 것은 일교차가 크다는 일기예보랑 같다.
건조함은 나처럼 마르다는 것과 어울린다.
산책로에는 한여름보다 힘들어 하는 이들이 적다.
정상에서 내려다 본 들녘이 점점 노랗게 변해가는 변색 때문에 가을이라는 확신이 선다.
정상에 앉으면 과거가 풀어진다.
가을의 진행 속도는 바람처럼, 아니면 중년의 시간처럼 빠르다.
가을은 색과 준비라는 단어를 만든다.
음력 9월 9일쯤이면 9개의 마디가 생긴다는 구절초가 향긋하게 보인다.
이 계절엔 체중이 늘어나는 느낌이다.
산속 사찰에서도 무청이 걸리고 겨울을 준비하는 소리가 가끔 들린다.
갈수록 따뜻한 보온병이 필요하고 마지막 노지포도가 배낭서 나온다.
계절은 변했지만 증오는 늘 같은 강도로 떠오르니 아직도 감사가 많이 부족하다.
이젠 솔잎만큼이나 내 반성이 산책길에 가득하다.
목욕탕의 나처럼 나무들의 나체를 쉽고 훤하게 볼 수 있다.
낙엽지면 풍수쟁이는 명당을 찾아 다녔을 것이다.
벗은 만큼 풍욕을 즐기는 계절 또 다른 저항을 위한 기다림이 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독소를 품은 아름다움이 단풍이라면 이건 실망스런 사실이다.
계단에 쌓인 수고한 잎들을 밟고 가기가 미안한 아침도 있다.
나무들은 가볍게 벗는데 나는 내복까지 껴입는다.
점점 아침에 보던 단골들이 줄어든다.
점점 해가 그리운 시간이다.
추상(秋霜)처럼 엄할 때도 있어야 한다, 특히 내게.
겨울
‘입동~입춘’까지의 겨울은 ‘동작 그만’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산은 겨울에 늘씬한 자태를 드러낸다.
덜 추운 어느 날 산에 가보니 인간들의 희망이 가득했다.
같은 산에서도 음지에는 오래 갈 얼음덩어리들이 살아있다.
바람은 턱이 아프도록 상쾌하다.
사람을 조심하라고 숲에 가로등이 생겼다.
사과와 반건시 곶감을 파는 상인들이 입구 자리를 차지했다.
어류 불법포획 금지라는 뜻은 오줌 줄기처럼 흐르는 도랑에도 고기가 산다는 뜻이다.
숲엔 생각보다 많은 묘지들이 자리하고 있음이 겨울이 되면 방사선처럼 바로 보인다.
사랑의 효과를 실험하는 소나무에 매번 쓰다듬는 관심과 안부 인사를 듬뿍 주기로 했다.
사람이 아니라 단장한 비만 강아지들의 숫자가 베이비부머 세대처럼 늘고 있다. 개가 많아진 것은, 인간 사랑에 배신? 동물 애호가들이 늘어서? 지금도 이유가 궁금하다.
겨울까지 위장용 썬글라스를 쓰는데 자외선 차단은 두 번째 목적이 되었다. 썬글라스 끼고 산에 오르니 편한 것이 눈이기도 하지만 맘이 더 편하다. 지인이 나를 보고 지나가는 건 나만 아는 것, 그만큼 켕기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겨울이지만 속에선 남몰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상상을 하면 착한 것이다. 움직임이 둔한 겨울엔, 대신에 마음이 우주처럼 팽창하길 기원한다.
인간들은 문을 나가면 옷을 입고, 나무들은 계절이 바뀌면서 옷가지를 챙긴다.
늦겨울은 싱싱한 과거가 점점 쌓여가는 중후함의 극치다.
겨울산은 침묵 그래서 나의 스승이다.
겨울인데도 땅속은 얼지 않았다는 것을 무심코 마신 약수터 샘물이 훈수했다.
차 소리가 겨울엔 더 신경 쓰인다.
메타세콰이아 잎들이 붉게 땅 속으로 전이되었다.
겨울엔 우울이 쉽게 온다.
겨울엔 타인의 체온을 느끼는 것을 참아야 하는 것은 장갑을 끼었기 때문이다.
사 놓은 아이젠이 너무 깨끗하다.
겨울 동면에 자주 들어가는 나는 나무와는 반대로 배만 뽈록 나왔다.
게으름 필 땐, 피톤치드 원액 몇 방울 미지근한 램프에 올려놓고 방에서 숲을 즐긴다.
문득 봄이 오면, 무서운 것이 넘쳐나는 시간일 듯한 사람들이 산책길에 북적일 것이다.
겨울은 잠시 숨고르기, 휴지기에 들어간 것뿐이다. 이 또한 삶처럼 긴박하게 지나갈 것이다.
송선헌
대전 미소가있는치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