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과의 동침

  • 등록 2014.12.16 11: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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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제1987번째

1. 올 봄이었던가. 낮에 한창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고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단다. 웬일인가 하여 진료 중간에 잠깐 짬을 내어 전화를 걸어보았더니, 다짜고짜 “여보, 여자 치과의사라는데… 혹시 이름이 OOO인 분이 치과의사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어요?”

순간 책장을 흘낏 올려다보니 마침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원명부’ 최신판이 보이기에 시간 날 때 확인해 주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특정 지역에 병원을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기에 찾는 데 다소 까다롭긴 했지만 이리저리 뒤적거려서 결국은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퇴근 후 집에서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서는 무의식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내 옛 고교 동창의 지인의 부탁이었다는 것이다. 그 지인의 오빠가 결혼을 하였는데 상대여자(올케)가 W치대를 졸업한 치과의사라고 해서 부모님이 너무 흡족해 하셨다고 한다. 사실 지인네는 상당한 재력을 지닌 집안이었기에 치과의사 며느리만 들이면 당장이라도 좋은 자리에다 병원 하나쯤은 너끈히 차려줄 태세였다.

하지만 그 며느리는 결혼하고 나서도 치과를 차린다고 하기는 커녕 남의 치과에 취직할 생각조차도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집안 친지들이 이상하게 생각다 못해 혹시 ‘사기결혼’이라도 당한 게 아닐까, 치과의사가 맞기는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단다.

그렇다고 며느리에게 대놓고 ‘치과의사 면허증을 보여 달라’ 하기도 그렇고, 어찌어찌 아는 루트를 통해서 슬쩍 캐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치과의사가 얼마나 고되고 힘든 직업인지 이해하기 때문에 그 며느리의 태도에 조금이나마 동병상련을 느낀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철저히 기대려는 결혼 풍속도를 지켜보는 심정은 다소 불편했었다.
남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결혼하려 했고, 여자는 산란(産卵)의 고통이 전혀 없는 아늑한 둥지와 결혼하려 했던 것이다.

2. 사실 부부는 서로 깊숙이 의지해있다. 대체적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기대고 있고 남편은 아내에게 살림이나 자녀양육 면에서 기대고 있다.
만일 지금 당장 옆 사람이 홀연히 사라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사실 요리나 집안 살림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솔직히 라면 밖에 끓이지 못한다.
배우자 없이 혼자서 얼마나 오랜 기간 버틸 수 있을까? 내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현재 돈을 벌 수 있는 준비가 전무한 듯하다. 내가 없다면 동네 마트에 나가서 허드렛 일을 하거나 어디 식당에 들어가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힘겹고 고단한 삶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내가 아내에게 우스개로 제안한 것이 하나 있다.
나는 주말마다 집에서 아내에게 부엌일과 빨래 등 집안 살림을 기초부터 차곡차곡 배우고, 아내는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든지, 옷가게 알바를 해서 의류점포를 운영할 노하우를 익히든지 하자고. 그래서 언제 닥칠지 모를 독거(獨居)의 생존법을 마련해놓자고. 더 이상 대책 없이 서로에게 기대고 있지만 말자고.
차현인 여의도 백상치과의원 원장

차현인 여의도 백상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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