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면 드디어 2015호를 탄 그대들이 이 행성에 도착하겠군요. 레이더에 그대들의 존재가 잡히기 시작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번잡 무미하던 이곳의 일상에 이내 잔잔한 흥분이 일기 시작하죠.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친구들과 뛰놀던 동네, 떠날 때 염려와 격려의 손을 흔들어주던 부모님 얼굴, 또 우주선 안에서 가족보다도 오랜 시간 부대끼며 미운 정 고운 정 들어버린 동료들… 아마 지금쯤이면 한 달 후엔 그들과도 헤어진다는 시큰함이 마음에 부딪혀 올 겁니다. 생각보다 파동이 커요. 뭐랄까 전우애 같은 거니까요. 커피 한잔 마시다 문득 서로 눈이 마주치며 센치해 지는 순간들 하나하나 부디 기억하시길. 그 커피 향이 뜬금없이 불어 와서는 알 수 없는 힘을 주곤 합니다.
호기심과 걱정들로 착륙 전 마지막 테스트 준비에 집중하기 힘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은 상황 그 자체보다 그 상황에 저항하느라 쏟는 마음의 에너지 때문에 배가되곤 하죠. 어쩔 수 없는 것들이라면 어쩔 수 없는 채로 품고 견디어냅시다. 담백하고 우아하게. 대신 긴 시간 전적인 몰두로 지쳤을 그대들을 위로 할 작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답니다. 뭐, 곡강연에 비한다면야 한참 초라하지만, 어느덧 연례행사가 되긴 했군요. 어쩐지 점점 이 일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에요. 막 착륙한 그대들의 빛나는 눈동자 탓인지, 부쩍 추워진 일터에서 막 돌아와 언 손을 호호 불며 모여드는 선후배 동료들이 애틋해서인지, 언젠가는 거기서 꼭 만날 것만 같은 누군가를 향한 기약 없는 내 그리움 탓인지 알쏭달쏭합니다만.
사실 상황이 그다지 낙관적이진 않아요. 시공간의 불가사의한 틈을 뚫고 여기까지 오며 거대한 파도 몇 번을 견디는 사이에 십여 년이 흘러 꼬마 여동생이 시집갈 처녀가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그대들 앞의 이곳은 지금과 사뭇 달라야 했을 테죠. 만끽해보기도 전에 서둘러 절약하고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그대들의 실망을 덜어 드릴 수 없어 미안합니다. 예측불허 기후가 최악이에요. 늘 우산을 챙겨야 하고 뭔가 햇볕에 말릴 게 있으면 내일로 미루질 못하죠. 식량 비축도 쉽지 않아요. 식량에도 공간에도 모두 세금이 있거든요. 우주선 안과 이곳의 다른 점 중 하나가 세금인데 이곳에선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든 것에 세금이 붙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만, 요컨대 따스하진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만 정보과 체험사이란 자석의 N극과 S극사이만큼이나 멀 테고 실은 그래서 나름 생생한 이곳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전하고자 편지를 쓴다는 것이 사설이 그만 길어졌네요.
도착하면 수많은 매뉴얼들을 보시게 될 겁니다. 거의 모든 것에 붙어 있다는 점에서 세금과 비슷하다는 블랙 유머도 있어요, 하하. 이 순간에도 새로 나타나는 각종 위기상황에 맞게 계속 제작 중이고, 이 편지며 곧 있을 그대들을 위한 환영식 역시 모두 매뉴얼에 따른 작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본인은 이미 잘 알고 있는 대처법을 굳이 기록 정리 하는 이유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거겠죠.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공유되고 있다는 건데, 고향의 여동생도 우주선을 타고 오는 이들도 어떻게든 돌봐주겠노라는 이 맹렬한 부채의식이야말로 내가 여길 좋아하는 이유란 점을 고백해야겠네요. 꾀에선 조조에게 한참 밀려 와룡선생을 모셔야 했고 관우, 장비, 조운 등 수많은 장수들을 보듬어야 운신이 될 사람이었지만 유비의 멋진 점 역시 남을 향해 또 세상을 향해 열려있다는 거였죠. 이러이러한 사람들과 좋은 뜻을 함께하고자 하니 나머지는 시간과 천지신명께 맡기겠노라 라는 그의 산뜻함은, 전부 다 내 머릿속에 있고 내가 곧 우주라는 확신으로 평생을 암살걱정에 누군가와 나란히 누워 자지 못했다는 조조의 경직과 비교되니까요. 적벽대전을 앞두고 상대의 화공을 염려하는 참모들에게 조조는 이 계절에 동남풍이 불 리가 없다고 일축했지만, 바람의 방향은 잠깐이라도 바뀔 수 있다는 공명의 생각, 그 순간을 기다리며 공명이 칠성단을 쌓는 걸 허락하는, 그리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는 유비의 모습에서 시간과 천지신명마저도 품에 넣고 부리는 우아한 자세를 보는 것입니다. 서로 도와가며 믿어주며 기다려주는 이런 모습이 감동을 자아내 비록 최후의 승자가 아닐지라도 삼국지의 주연이 된 것 아닐까요. 늘 모여 앉아 매뉴얼 만들며 주위를 챙길 궁리에 여념이 없는 이곳의 선후배, 동료들은 그래서 역시 조조보단 유비와 공명 계열의 인물들이라고, 역사의 주역이 될 거라고 난 믿고 싶어요. 시공간의 웜 홀을 지나며 왜곡되기 일쑤인 승패보단 뭉클한 어떤 움직임이 중요한 거라고요.
난 복제품 렘브란트 몇 점, 역시 복제품 자코메티 몇 점에 둘러싸여 매뉴얼 찾아가며 일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의 입 속을 치료한다는 건 우주탐험만큼이나 묘기니까요… 하하하. 꽤 자주 서글픔이 밀려오지만 내가 추구했던 것의 원형이 쾌적함이지 흘러넘침은 아니었다고 다독이며 적정 규모의 생태환경 구축을 지향하죠. 집에 불이 난다면 결국 렘브란트(물론진품)보단 고양이를 먼저 안고 나와야 할 거 같다고 고백한 자코메티를 생각하면 결코 집에 렘브란트 작품 따위를 걸어둬선 안 되겠다 싶어지거든요. 고양이는 선택.
선택받아 강인해진 이들만이 해낼 수 있는 멋진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개성 넘치는 이곳에 그대들은 이제 아주 가까이 오셨습니다. 천장까지 매뉴얼 쌓아놓고 기다리는 우리와 긴 항해를 잘 견디고 도착한 그대들이 함께한다면 우린 결국 답을 찾을 거예요. 늘 그랬듯이. 시간은 기다리는 자의 편이니까 우리 스스로에게도 또 시간에게도 시간을 줍시다. 저녁 차려놓고 기다릴 테니 걱정 말고 오세요. 마지막 테스트도 쑤욱 통과하시길 빌며. 당신의 아멜리아.
매년 이맘때가 되면, 20여 년 전 국가고시를 보던 제 모습이 떠오릅니다. 올해도 그 시험을 치르는 후배들에 대한 생각이 이어져, 뭔지 모를 공감을 하게 되고 응원하게 됩니다. 저마다 모교의 치과대학동창회가 졸업생들에게 열어주는 축하모임에 참석하는 선배들의 마음이 다 이렇지 싶습니다. 모든 치의국가고시 수험생들에게 건승을 기원하며….
오지연 서울치대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