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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새로운 일을 준비하다 보면 그리기를 하길 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쉬운데 채우기를 하길 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그리기는 기획의 성격이, 채우기는 실무의 성격이 있어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에 그리기는 이전만큼 어렵지는 않다. 그리기는 채우기에 비해 몸의 고됨이 덜하니 실행하기가 쉽다. 일이 실패할 경우 그리기를 한 사람이 영향을 많이 받을 것 같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이다. 그린 그림의 크기가 클수록 더욱 그런 편인데 실현 가능성이 적기 때문이다.
 

채우기는 일에 대한 경험을 쌓아 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업무이나 대개 반복적인 일을 수반하고 실무적인 지식을 동원해야 하므로 머리와 몸이 고되다. 일에 대한 경험이 부족할 때는 채우기를 통하여 본인이 투자한 시간만큼 성장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지고 나면 채우기를 지속하기가 어렵다. 잠을 줄여야 하고 투자한 시간만큼 지속 성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기가 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주 접할 수는 없지만 사안에 대해 통찰력과 소화력을 갖춘 그리기를 만나면 큰 배움을 얻는다. 그런 그리기를 하는 사람은 그리기를 시작할 때부터 채우기가 끝난 상태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가졌고 채우기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과 난관을 파악하고 있다. 그 능력이 오랫동안의 채우기를 통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일상에서 만나는 그리기는 사안에 대한 중요성의 인식 정도이거나 세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용어의 나열에 그치는 가벼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부도 그런 것 같다. 좋은 그리기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히고 할 때는 노력한 시간만큼 빠르게 성장하고 보상을 받지만 어느 정도 좋아지고 나면 더 좋아지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우리는 결정적인 단어를 포함하는 짧은 문장이나 가려운 부위를 정확히 긁어주는 강의처럼 내용의 근본이나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을 주는 순간을 가끔 만날 수 있다. 충분히 좋아지고 나서도 잠을 줄인 다음에야 얻을 수 있는 더 좋아진 그런 수준 말이다. 그런데 정말 잠을 줄인 만큼, 몸이 힘든 만큼, 정성을 들이고 갈등을 한 만큼 딱 그만큼 좋아진다. 
 

지나간 시간동안의 발휘한 역량을 토대로 앞으로 어떤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평가받는 나이가 되고 있다. 부족한 채우기를 통해 더 좋아질 수 있을지, 내가 그리는 그림이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지, 내가 그린 그림에 잠을 줄여 채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성장과 보람을 줄 수 있는 것인지 걱정이 된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고홍섭
서울대 치의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