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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를 다시 읽으며

배광식 칼럼

60년대 말 예과 때,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를 읽었다. 그 당시는 실존주의 철학이나 실존주의 문학이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던 때였다. 싫든 좋든 인류 앞에 닥친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그 상황에 갇혀버린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와 새로운 윤리의 모색을 시도한 사람들의 문학이 협의의 ‘실존주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이 된 상황에서, 카뮈의 ‘페스트’가 떠올라 다시 읽어보기로 하였다. 카뮈는 본문 시작 전에,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라는 다니엘 디포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194X년 프랑스령 알제리의 오랑시에서 발생한 페스트로 봉쇄된, 오랑시에 갇힌 시민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제로 인구 20만인 오랑시에서 페스트가 발생한 것은 아니니, ‘페스트’ 전체의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대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페스트에 빗대어진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


1941년부터 1947년에 걸쳐 7년 만에 완성된 소설이고, 꼼꼼한 작가노트의 내용이나, 카뮈의 이력으로 유추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은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다. 개인적으로 전혀 적대감이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인명을 살상하는 부조리한 전쟁 상황에 갇혀버린 인류를, 원치 않게 유행하는 페스트의 공포 속에 봉쇄된 오랑시에 갇힌 채 부조리한 감옥살이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시민에 비유한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페스트에 직면하여, 사람들의 초기대응 태도는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도피, 초월(체념), 반항(극복의지를 가지고 현실에서 최선을 다함)이 그것이다.


오랑시에 파견 나와 있던 기자인 랑베르는 도피형으로, 끊임없이 폐쇄된 시의 문을 넘어 애인을 만나러 갈 불법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매혹적인 설교자인 파늘루 신부는 초월형으로 모든 것이 신의 징벌이라 믿고 체념해 현실 너머에 있으며, 나중에 페스트에 걸렸을 때 의사의 진료를 거부한다. 의사인 리유는 반항형으로, 페스트 병균의 자연스러운 형태인 대유행에 반항하며 주변 사람들을 위해 당면한 일에 최선을 다한다. 리유의 반항에 함께 하는 타루는 자원자를 모집하여 보건대를 조직하고, 그랑은 시청 직원으로서 매일 페스트 관련 집계를 한다.


4월의 거리나 건물복도에 매일 아침 죽은 쥐들이 나뒹굴어져 있는 것을 신호로 시작된 페스트가, 일주일에 수백 명씩 사망하는 절정기로 치달아가면서, 세 유형의 사람들은 점차 반항이라는 단일한 대응방식으로 집약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예로 도피형 기자 랑베르는 시의 문을 빠져나갈 기회가 왔을 때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임을 깨닫고, 오랑시에 남아서 보건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초월형 파늘루 신부는 아무 죄도 없는 어린이가 페스트로 고통을 한껏 겪다 사망하는 것을 목격하고,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준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한다.


소설 ‘페스트’에서 인간의 초기대응 태도 3유형(도피, 초월, 반향)은 코로나19에서도 대동소이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여부는 시대가 다른 만큼 다를 수밖에 없다. ‘페스트’에서 오랑시의 도피형은 시의 엄격한 봉쇄로 도피가 불가능했으나, 현재의 코로나19에서는 일부 전체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지역봉쇄가 불가능하다. 예로 우리나라의 당정청협의회에서 대구 봉쇄 발언이 나왔으나 큰 반발 속에 지역봉쇄가 아니라고 긴급히 해명했고, 트럼프 미대통령이 미국 확진자가 12만이 넘고 뉴욕시 확진자 5만이 넘은 시점에 뉴욕시 및 인근지역을 강제격리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나, 위헌으로 불발되고 여행경보로 그쳤다.


국경 봉쇄의 경우에도 창궐국가로부터의 입국을 막는 정도이고, 창궐국가에 전세기를 띄워 자국민을 귀국시키기도 한다. 창궐시초국인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초기에 막은 국가들은 비교적 확진자 수가 적게 유지되고 있다.


대만의 방역은 세계적 모범 사례로, 4월 3일 현재 감염자 339명. 사망자 5명에 불과하다. 존스홉킨스대 방역학 박사 천젠런(陳建仁) 부총통과 타이베이의대 졸업 치과의사 천스중(陳時中) 위생복리부장(보건복지부 장관)의 두 전문가의 활약 덕이다. 대만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4월 3일 현재 확진자(1만62명)는 30배나 되고, 사망자(177명)는 35배에 달한다.


대만은 진작에 국민건강보험과 해외여행 이력을 통합해 감염 위험 지역 여행 여부를 실시간 조회가능토록 해서, 조기 발견·격리가 가능했다. 한국은 첫 확진자 발생 20일이 지난 후 코로나 2차 감염 발생 8개국의 여행 이력을 의료기관이 조회할 수 있었다.


천스중은 역대 최장 위생복리부장 기록을 세우며 ‘중앙전염병지휘센터 지휘관’이라는 직함으로 강행군해 ‘철인(鐵人)부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국내 최고 전문가인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은 차관급으로 국무회의에 정식 참석자격도 없고, 안건 보고를 할 뿐이다. 대만은 1월 24일 의료용 마스크(N95) 수출을 금지했고, 한국은 2월 26일에야 마스크 수출을 제한했다. 대만은 2월 6일 중국발 입국 전면 금지로, 대만 거류증 소지자  입국만 허용됐다. 반면 우리는 2월 4일 중국 후베이성 입국자만 막았고, 대한의사협회와 대한감염학회의 입국 금지 범위 확대 권고는 무시됐다. 국가 방역은 전문가가 주도하도록 해야 효율적이다.


2차대전 후, 전승국인 미·영·불·소·중 중심으로 국제연합 창설, 달러 기축 통화로 미 중심 경제 체제 성립,  중국공산당의 내전 승리와 소련 군대가 주둔한 동유럽, 외몽고, 북한 등의 공산화로, 미·서유럽 중심 자본주의 진영과 소·중·동유럽 중심 공산주의 진영 냉전 시작, 패전국의 식민국 독립 등 큰 변동이 일어났다.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유럽통합 등 지구촌의 길을 걷던 세계는 이제 코로나19 이후 유럽통합이 흔들리는 등 급격히 반세계화(Deglobalization)의 길을 걷고 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