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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비 회수- 다시 I. O. U. 2

임철중 칼럼

 

대전 만년동 스타벅스 앞 06시 40분. 젊은이 대여섯이 줄을 섰다. 가방이나 배낭에는 노트북이 들어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왼 종일 앉았어도 눈치를 주지 않으니, 쾌적한 독서실(?)에 좋은 자리 잡으려고 일찍 나와 기다린다. 몇 분 걸으면 서구보건소 버스정류장. 새벽 교통인구가 적고 배차시간이 떠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시계를 60년 전으로 돌려보자. 황금노선 홍릉 - 노고산 1번 버스 종점은, 현 신촌 로터리에서 서강대 쪽에 위치한 비포장 허허벌판. 비오는 날이면 신촌이 아니라 진촌,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동네였다. 새벽 여섯시면 버스타려는 시민이 백여 미터씩 줄을 섰다. 70여 명쯤 꽉 차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여차장이 “오라이!”, 차체를 탕탕 두드리면 출발이다. 버스는 처음 몇 정거장을 난-스톱으로 달린다. 다음 버스는 반만 태우고 출발하여, 이대 앞과 굴레방 다리에서 각각 20명씩을 더 태운다. 숨이 막혀 비명이 터져 나오면, 버스는 갈 짓 (之)자로 곡예운전을 한다. 젓가락 고르듯 승객을 이리저리 휘두르면, 신통하게도 다음 정류장에서 몇 사람 더 탈 공간이 생긴다. 능구렁이 기사님 비장의 특기다.


새벽 네 시 통금이 풀리자마자, 남산도서관 정문 앞에는, 삽시간에 학생 백여 명이 줄을 선다. 달리 공부할만한 장소가 없었다.

 

당시에 그 많던 새벽 인파와 도서관 앞의 장사진(長蛇陣)은 무엇을 뜻하는가?


개발연대 세대가 얼마나 빡세게 공부하고 뼈 빠지게 일했는가를 웅변한다. 등록금 액면가는 지금보다 작지만, 가난하고 헐벗은 그 시절에는 까마득한 거금이었다.


자식만은 내 꼴을 만들지 않겠다는 아버지는, 유일한 재산 소를 팔고 전답을 잡혀 학비를 보냈다. 대학이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牛骨塔)이었던 이유다. 숙식비에 보태려고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를 안 해본 학생이 거의 없었다. 가난의 아픔을 잘 알기에, 십시일반 더 어려운 친구 등록금을 모아 주기도 했다. 그렇게 투자한 돈이 내 청춘과 맞바꾼 피요, 부모님 허리가 휘도록 흘린 땀과 등골임을 잘 알지만,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본전’을 찾겠다거나, 얼렁뚱땅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풍조는 드물었다. 가난을 겪고 고생해본 사람은, 그런 욕심이 다른 약한 사람을 다시 아프게 하며, 정직하고 마딘 돈만이 나와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아니, 어른을 모시고 살던 세대에게 부모님 은혜란, 금전으로 환산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었다.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려는 무한 리필의 교육열은, 투자가 아니라 바로 대를 이어 베풀어지는 그런 은혜였다.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부모의 희생과 자신의 노력을 ‘투자비용’으로 환산하여, 플러스알파를 벌고 1세보다 더 떵떵거리며 살려들면, 지구상의 재화가 기하급수로 늘어나야 한다. 역사는 그것이 한낱 꿈에 불과함을 보여주고, 선현(先賢)들은 삶의 목표를 금전적인 성취에 두지 말라고 가르쳤다. 금전은 낯가림이 심해서 서두르고 매달리면 달아나는 법이니, 돈을 따르지 말고 돈이 나를 따르게 하라는 말도 있다.


물레는 괴타리에서 탈이 나듯, 모든 사단은 ‘조바심’에서 비롯한다. 천문학적 학비에 수련과정까지 십여 년, 박봉에 보건소나 군의관, 다시 몇 년 더 땀을 흘려 교수직이 수지가 맞느냐는 말도 옳다. 그러나 공공의료에 봉사하고 훌륭한 제자 배출에서 얻는 성취를, 단순히 금전으로 맞바꿀 수는 없다. AI 시대를 맞아 공공의료의 비중이 성큼 커지는 추세는, 코로나19를 계기로 놀랄 만큼 가속화되고 있다.


퇴출되는 직업이 수없이 늘어나는 가운데, 치과 의료업은 그나마 대체불가능하고 대면진료가 필수적인 전문직이다. 치과계의 희망적인 미래를 위해서는, 학문적이고 기술적인 발전보다, 정신적·윤리적인 준비가 더 절실한 시점일지도 모른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