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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이야기

시론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으면 그 누구도 바다에서 손도 씻지 못 한다.”


페니키아인이 세운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기원전 3세기 무렵 경제적인 부흥을 바탕으로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지중해 초강대국이었다. 지중해 연안의 풍부한 자원을 장악하며, 동서를 잇는 해상무역을 독점하였고, 노예들을 이용한 집단 농장도 발달하였다. 이 무렵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해외 진출을 꾀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지중해의 제해권과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와 사활을 건 투쟁을 벌이게 되는데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두 나라는 120년 사이에 3차례에 걸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


카르타고 해군의 사령관 하밀카르는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후 조국에서 지지기반을 잃고 에스파냐로 이주하여 곳곳을 차례대로 정복하며 세력을 넓혀 나간다. 그러던 중 암살당하고 그의 아들 한니발은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서 에스파냐 전체를 정복한다. 아버지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나중에 자라면 꼭 로마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신에게 항상 맹세를 시켰다. 28세가 된 아들은 드디어 그 약속을 실행한다. 그는 5만 9천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고, 론 강을 건너고, 알프스를 넘어서 기원전 218년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갔다. 행군하는데 꼬박 넉 달이 걸렸고, 이탈리아 땅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사는 2만 6천명으로 도중에 3만 3천명의 병사를 잃었다. 특히 알프스를 넘는 보름 동안에만 2만 명의 병사를 잃었지만, 용병으로 구성된 병사들의 반란이나 이탈은 없었다. 그는 부하들을 감화시키는 인품과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는 병사들과 똑같이 고생하며 행군 중에 한 쪽 눈의 시력도 잃었고, 전투 중에는 맨 앞으로 돌격하였고, 전장에서 제일 나중에 떠났다.


한니발의 군대가 험로를 돌아 알프스를 넘어 한겨울에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왔을 때 로마인들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 코끼리 부대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당시에는 겨울이 되면 전쟁 중에도 휴전을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한니발의 위대함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것,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실행한 과감함에 있었다. 후세에 나폴레옹도 6만 대군을 이끌고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젊은 한니발은 무모 했을까?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실행되었다. 바닷길은 로마 해군이 이미 장악한 상태라 불가능 하였고, 도중에 로마군과 불필요한 전투를 벌이지 않으며, 로마연합에 적대적인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들을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알프스를 넘는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병력 손실도 있었지만, 그는 로마에 적대적인 주변 갈리아 인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보강했다.


한니발은 로마와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의 집정관 코르넬리우스에게 중상을 입힌다. 그의 아들이 구해내지 못했다면 코르넬리우스는 카르타고 군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집정관의 아들은 이제 17세가 된 스키피오. 한니발은 그 때 그 젊은이를 잡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 16년 후 한니발은 로마군 총사령관이 된 그를 자마에서 독대한다.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시작한 전쟁에서 한니발 군이 크게 승리하자 로마에 적대적이었던 북부의 갈리아 부족들은 모두 한니발 편으로 돌아섰다. 그 기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하며 차례로 연맹 도시들을 정복해 나갔고, 로마연합을 탈퇴하는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로마군은 전면전에서 한니발 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한편, 이탈리아 반도 밖의 전선에서 카르타고 군은 로마군에게 패배를 거듭하였다. 한니발은 본국의 지원을 받으려 했으나 위급한 다른 전선으로 병력이 분산되다보니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거기다가 로마군의 지연 전술로 반도의 전쟁은 고착상태로 빠져 들었고, 어느덧 16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적지 한가운데서 기적에 가까운 연승을 올리며 한 때 로마를 붕괴시키기 직전까지 몰아갔지만 한니발은 결국 반도의 장화 끝까지 몰리게 된다.


한편 총사령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가 장악한 에스파냐를 정복하고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전선을 확대하였다. 다급해진 카르타고는 로마의 강화조건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강경파들이 한니발을 본국으로 불러 들여서 로마군에 대항하게 하였다. 한니발은 최정예군 1만 5천명을 데리고 본국으로 귀국한다. 기원전 202년 마침내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카르타고 남부 자마에서 최후의 결전을 치른다. 전투를 앞둔 전날 양쪽의 장군이 독대하는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미 전세가 기운 것을 예감한 백전노장 한니발이 강화를 제의하려고 했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배신을 경험한 젊은 스키피오는 전투를 준비하라며 거절하였다. 다음날 동이 트자 드넓은 평원에서 카르타고군 5만과 로마군 3만 5천이 격돌하였다. 한니발은 이 전쟁에서 최정예군 1만 5천명을 모두 잃으며 회복불능의 패배를 당하였다. 카르타고 군의 전사자는 2만이 넘었고, 2만은 포로가 되었다. 나머지는 열흘거리에 있는 수도 카르타고로 모두 달아났다. 로마군 전사자는 4천명쯤 되었으니 로마군이 그 동안 한니발에게 당한 굴욕을 완벽히 되갚은 것이었다. 비로소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확고부동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으면 바다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제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가리켜 ‘마레 노스트룸’(Mare Nostrum)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우리들의 바다’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아피아 가도가 완성될 무렵 지상의 길과 바다의 길을 모두 장악하였다는 로마인의 자부심을 담은 표현이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을 무찌른 구국의 영웅 스키피오에게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를 정복한자라는 뜻)라는 칭호를 주었지만 ‘전략의 아버지’ 한니발을 더 명장으로 평가했다. 스키피오보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한니발은 엄청난 전략 전술적 역량을 발휘해서 로마를 붕괴직전까지 몰아넣었고, 로마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기 때문이다. 로마 여인들은 우는 아이를 달랠 때 “한니발이 바로 문 앞에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럼 한니발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뒤에 로마와 같은 국가가 없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당시 카르타고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국내 농업 기반 세력과 해외 무역 기반 세력의 기득권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한니발 이외에는 로마군에게 이긴 장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인재도 없었다. 군대는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패장에게는 책임을 물어 처벌하였다. 그리고 한니발이 이탈리아 본토에서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가며 선전했지만 다른 해외 식민지에서 카르타고는 로마군을 물리치지 못하며, 로마를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렸다. 반면에 로마는 지도층의 풍부한 인재를 바탕으로 일치단결 하였다. 패장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다시 기용하는 유연함도 있었다. 승자가 승리의 혜택을 패자에게도 누리게 하였다. 실제로, 전쟁에서 패배한 부족의 상류층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전쟁이 끝난 지 불과 20년 뒤에 과거의 적을 자기네 지도자로 선출하는 로마였다. 이기면 아량을 베풀어 패자까지도 협력자로 만드는 로마인의 방식이었다. 로마연합의 굳은 결속은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한 최대 원인이었다. 한니발이 그토록 그 결속을 끊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자마전투 후에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조국의 재건을 위해 힘썼지만 나중에 정적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재기를 꿈꾸며 망명 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궁지에 몰린 그는 항상 품고 다녔던 독약을 마신다. 한니발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두고 경제적으로 부유했지만 정쟁, 부패, 기득권 다툼은 지중해 초강대국 카르타고가 신생국 로마에게 멸망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