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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연](수필)히말라야에 꽃 핀 인간애 태평양에 뿌려지다 (상)/이병태


- Sir Ed를 흠모하면서 -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자신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8,848m)를 최초로 오른 책임감이어서인지 네팔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설립하면서 인간 지고(至高)의 생활을 하였다.
그가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오른 것은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이다.
이때 나는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때문에 서울 종암초등학교에서 경주 황남초등학교로 피난하였다가 청주 강서초등학교로 옮겨 다니며 生과 死를 경험할 때였다.
그는 1919년 7월 20일 뉴질랜드 오클랜드 부근 작은 마을 터우카우리에서 태어났다. 커서는 양봉을 하였다. 


1953년 6월 2일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하는 날이었다. 전날 힐러리의 에베레스트 등정소식이 영국을 진동시켰다. 영광스러운 대관식은 30년간 도전과 실패로 이어진 에베레스트의 한을 풀어버린 환희가 넘쳤다. 산악인 힐러리가 귀국하자 그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그래서 힐러리는 써 에드 (Sir Ed)이다.


1961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산악회에 가입하고 광화문 노점에서 파는 이름모를 잡지와 ‘알파인 저널"에서 존 헌트 대장, 에드먼드 힐러리, 텐징 노르가이 등의 이름을 알게 됐다.
인수봉·오봉·우이암·주봉·선인전면·만장봉은 서울에서 먼 곳이었다. 가냘픈 나는 선배들의 전적인 지도와 격려로 바위를 만지고 더듬고 할퀴면서 부둥켜안고 젊음을 지냈다. 그럴때 ‘글쎄 힐러리하고 텐징중 누가 먼저 올랐을까’라며 이야기를 시작하면 선후배는 물론 주위 사람들도 관심을 가졌다. 어떤 때는 한두 달이 지났는데도 바위 밑에서 만난 친구가 ‘그때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이 누구라고 했지?’라고 묻기도 했다.


1960년대니까 산악인 아니면 일반은 전혀 모르는 전설 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치대산악회 신입생의 훈련장이었으며 졸업생 환송 캠핑터였던 오봉골에서 ‘그때 등반대장은 존 헌트였거든’ 하면 모두들 신선한 지식으로 받아들였다. 오흥조 선배는 ‘아유 저 입아구’하면, 황영휘 선배는 ‘그 구라 내버려둬. 구라는 아냐’하며 지냈다.


몇 집에 한 대씩 있는 라디오뿐인 시대에 등산소식이라고는 철저하게 없던 시대였다.
문맹이 많아 신문 잡지 구독조차 적었던 시절. 더욱이 6·25 전쟁 이후, 파괴와 질병과 빈곤에서 벗어나는 시기에 등산은 사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눈 밖에 나는 행위였을 때다.
나는 광화문 일대, 지금은 세종로 사거리이다. 동아일보 건너편 국제극장(현 동화면세점 자리)과 조선일보 사이 그리고 서대문 쪽 현 광화문오피시아 앞거리의 좌판에서 산(山) 등산잡지를 보면서 나의 머리는 깨였다. 좌판에 널린 천연색 사진은 백퍼센트 이국적이었다. 만져보지도 못한 배낭과 장비, 그 화려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흥분도 했지만 등산복 대신 염색한 군복, 등산화 대신 군화를 신고 다니는 현실이었다.


적설로 새하얗고 이름도 모를 골짜기의 울긋불긋한 텐트와 리조트 시설들은 꿈같은 정경이어서 환상만 간직할 뿐이었다. 알프스 산록의 통나무집과 산악열차는 내 상상력의 클라이맥스로도 감당할 수 없는 머나먼 세계의 것들이었다.
지내놓고 보니 일제강점 36년간 8·15이후 혼란기, 6·25 등으로 나와 같은 세대 대부분은 억울하고 암울한 시대를 보낸 것이다. 이 시기에 역경과 고난으로 죽어간 동년배들을 생각하면 나는 호강한 부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