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한민국치과계에 때가 이르러, 일상의 진료현장은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슈일 수 있는, 우리들의 리더를 선택하는 이벤트에 ‘모두 관심을 기울인다’라는 옳은 결정과 ‘참여’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존경하고 친애하는 우리 치의님들 모두, 그 곳이 어디였든, 어떤 목소리였든 각자 보여주신 치과계에 대한 사랑의 몸짓이었고 헌신의 실천이셨음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어느 길목에서는 서로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던 순간들도 있었었지만… 그건 왜였을까라는 질문에 이런 싯구를 떠올려봅니다.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 -소동파- 횡간성령측성봉 橫看成嶺側成峰 원근고저각부동 遠近高低各不同 불식여산진면목 不識廬山眞面目 지연신재차산중 只緣身在此山中 횡으로 보면 산줄기, 측면을 보면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보는 이마다 다르니, 진정 알 수 없노라, 여산의 참모습을. 그것은 이 몸 산중에 있기 때문이리라. 이제 사위를 덮었던 안개도 걷히고, 대략 산중을 벗어나 원경을 바라볼 자리로 돌아들 오신 듯 싶습니다. 여산의 ‘참모습이 무엇이다’ 라고 뜻을 모으기 힘들었던 까닭은, 우리 모두 그 산에 오른 길, 머물렀던 자리, 내려온 길이 서로 다르다보니 바라
창간 50주년을 맞는 치의신보는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 치과의사의 친구! 친구는 닮는다… 그것도 50년을 함께 했다면 그 세월의 무늬와 결 대부분이 두 친구 안에 닮은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으리란 점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문득 ‘우리들, 대한민국 치과의사들의 자화상이랄까,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떤 모습이며, 또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라는 새삼스런 질문을 해 본다. ‘국민구강보건향상을 위하여 그 소임을 다하며…’라는 구절이 떠오르지만 이것은 궁극적인 해답으로 이끌기엔 다소 모호하다는 느낌이라, 좀 더 심층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는 단칼에 베는 시원스런 스피드만큼이나 증례마다 나타나는 unpredictability에 대한 유연성이, 첨단의 테크닉인가 여부보다는 재현성 있게 나타나는 신뢰도가 더욱 중요하다. 그 어떤 직업군보다 열정적으로 최신지견과 뉴테크놀로지를 배우고 익히지만, 직접 자기 환자에게 적용할 때는 예외 없이 시간을 두고 예전의 것으로부터 느리고 신중한 전이를 시도한다. 즉 ‘그것이 유형이던 무형이던 시스템의 느린 교체’가 우리들의 전형적인 거동(behavior)패턴인 듯하다. 왜일까? 최신지견에 열광하는 우리들이므로 새
우리는 어떤 상황과 관련하여 종종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대개는 이미 대화와 소통이 심각히 불가능하고 갈등이 극한에 이르러 충돌이 불가피한 때에 선전포고의 용도로 사용되거나, 단순한 으름장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온 용어였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용어가 너무나 자주, 그리고 상황의 초반에 쉽게 등장한다. 본래 ‘특단(特段)’의 사전적 의미는 ‘일반적인 것과 아주 다름’으로 되어있고, ‘조치(措置)’의 그것은 ‘어떤 문제나 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대책을 세움, 또는 그 대책’ 이라 되어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21세기 대한민국이 ‘일반적인 것과 아주 다른 문제나 사태’가 그토록 자주 생기는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구태한 정치에 경직된 제도와 방황을 견지하는 문화는 특별히 ‘아주 다른’ 역동적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주변에 매사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콧김을 내쉬는 경우가 점점 잦아지는 것은, 필시 우리들이 모든 일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안에서 언제부터인가 고갈되고 망각된 인내심과 자기반성이 없는 시각과 자세로 임하는 까닭이리라 생각해 본다. 개인이나 집단이 행하는
1950년 11월 아흔 넷으로 생을 마감할 때 조차, 자신의 묘비명에 농담에 가까운 말을 남겼고,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가슴이 뜨끔할 만큼 의표를 찌르는 말들로 우리에게 익숙한 조지 버나드 쇼(G.B.Shaw)는, 1925년 노벨문학상을 영국에 안겨준 더블린 출신의 문학가요, 언론인이요, 극작가이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흑백텔레비전 방송이 1936년, 그가 80세일 때에야 시작되었으니, 이 분의 한창 나이시절, 신문은 바로 단일대표 미디어라 할 만큼 독점적인 대중매체였다. 그런 당시의 영국 신문을 향해 쇼가 남긴 말이 있다. “신문은 자전거사고와 문명붕괴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듯하다. " 버나드 쇼의 어록다운 형태와 의미를 가지는 한마디라 할 수 있겠는데, 그 당시 사회와 권력(미디어를 권력이라 표현하자면)에 대한 비판이니 응당 표현수위가 높을 수 밖에 없겠다 짐작하더라도, 독점미디어인 신문에 대해 맘 단단히 먹고(?) 엄중한 당부를 전하는 영국 노신사의 ‘빳빳한 윗입술’을 보고 있는 듯하다. ‘자전거사고’는 동네 얘깃거리이니 신문에서 다룰 기사가 아니며, ‘문명붕괴’는 호외를 만들어서라도 다루어야할 너무도 진지한 내용이라는 단순한 지적을 그가 하고 있
우리 치과계가 그러하듯, 지구촌 전체가 장기적인 저성장의 먹구름을 근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예전처럼 불경기와 호경기가 자연스럽게 번갈아 순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서로 협의라도 한 듯 여러 미디어에서 한결같다. 이제까지의 경제이론은 고령화의 결과인 노동인구비율감소, 보편적인 행복과 복지 기대수준의 상승, 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과 관련된 생산비용의 추가와 같은 것들 쯤이야 과학발전과 기술혁신을 통해 노동생산성만 상승시킬 수 있다면 GDP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절대명제하에, 호경기와 고성장이 도래할 때마다 얼마든지 불경기와 저성장의 부진을 메워나갈 수 있는 이론과 실재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근자의 여러 가지 현상들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한 반복의 시대를 다시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징후가 보인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중 이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막 지난 64년생의 모타니 고스케는 2차대전 후 부모세대의 일생을 통해 지금까지의 일본을 통찰하며 이러한 일본경제의 드러나지 않은 실상과 부실한 대책들을 다면적인 자료와 분석을 통해 진솔하게 간파한 석학이다. 그는 여러 면에 대한 남다른 직관력과 통찰력을 보이지만,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필자의 모교대학동창회에서는 2월 졸업을 앞둔 후배들을 위해, 이른바 ‘신입동창회원환영식’ (이 행사를 DCODental Community Orientation이라 이름지어 진행해왔다)을 준비한다. 모교의 동창회원은 8000여명에 이르는데, DCO라는 신입회원환영식을 치르고 입회한 후배들은 지난 몇 년간 기껏해야 400여명 정도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에게 해주는 신입생오리엔테이션도 아니고, 어엿한 치과의사들에게 기성세대의 무슨 잔소리가 새삼 필요한 것일까하며, 혹자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도 있겠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대학교육종료와 현장실무개시의 연결에 대한 필요성과 관심은 치의학외의 다른 전공분야에서도 부쩍 활발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예컨대 서울대학교의 정치외교학과에서는 GLP(Global Leaders Program)으로 졸업생들이 재학생들을 가이드하고 양성함에 학부과정중의 졸업생참여, 토크콘서트 등을 수시로 가지며 자연스러운 선후배간의 멘토링이 이루어지는 네트워킹을 구현하기 시작했고, 동대학의 공대출신의 여성동문들이 여성재학생들과의 모임을 도모하여 네트워크를 구축하려는 숙원을 2015년에 ‘WIINS(Wo
‘子不語怪力亂神.’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의 가르침 중, 공자(孔子)는 괴이(怪異), 폭력(暴力), 문란(紊亂),귀신(鬼神)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미디어가 미디어로서 계속 인정받고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곱씹어봐야할 화두를 던진다. TV뉴스의 기사들과 뉴스의 아류격인 프로그램들의 화제들은 물론, 인터넷 포털들의 관심순위로 대변되는 검색어 순위도 거의 怪力亂神에 관한 것들이 점령했다. 우리가 몸담고 아이들을 키우는 이 사회에 정말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하는 호기심에 채널을 고정하고 시청해보거나, 검색어에 마우스를 끌어다가 클릭하여 차분히 보다보면, ‘이 내용들이 모두 확인된 사실에 근거하고, 구체적인 인과관계가 성립된다고 인정하며 전하는 이야기들일까?’ 하는 고리타분한 의문을 가지게 된다. 또 만일 그것들이 사실이고, 필연성은 그만두고라도 일말의 개연성이라도 있어 기사가 되고 화제가 되었다면, 이러한 怪力亂神의 이야기들을 이토록 우리에게 열정적(?)으로 전해주는 것은, 정녕 ‘알 권리’라는 그 흔한 시민의 권리를 구현해주려고 소중한 가치가 담긴 정보를 전달해주는 노력인가에 대한 질문도 하고 싶어진다.‘道聽
21세기 지구는 자기자신에 대해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그간 별로 심각히 생각하지 않던 깨끗한 공기와 물과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뭔가 대책을 마련해 보려고 제대로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지 않으면 희망(希望)이 없음을 깨달은 듯 하다. 다행이다.흥미롭게도, 희망이란 단어는 도저히 해법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궁경(窮境)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그 이전 시점에서는 그만큼의 간절함이 없는 까닭일 것이다. 절박해져서야 문제의 발단과 전개와 실상을 새삼 자세히 살피는 것이 매우 비효율적임을 알면서도 많은 집단들이 그런 상황을 반복하고 후회한다. 의지를 가진 어떤 주체가 문제의 발단과 추이를 시종일관 경계하고 있지 않다면, 무방비상태의 어떤 집단에 대한 안팎의 끝없는 도전과 위협은 그 무관심과 나태에 대한 대가로 종내엔 절망에 직면하게 된 구성원들에게 어둡고 고통스러운 긴 시간과 희생을 요구한다. 희망을 찾아 정처없이 헤매이게 하는 것이다.주변여건이 호의적이지 않거나, 내부의 일체성(integrity)이 부족할 때라면 ‘저절로 잘되는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거’라는 의도적인 부정적 가정을 과감히 선포하고, 구성원들이 단결하여 경계하고 대응함이 현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