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아버지에게 필요한 물건이 없느냐고 여쭈었더니, 새로운 안경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나는 내심 놀랐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특정한 물건을 갖고 싶다고 하신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여가시간이면 소설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시던 분이 토요일 내내 낮잠만 주무시던 모습이 이상하기는 했었다. 노안(老眼)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딸이 아버지에게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는 단어는 아니었다. 내가 잠시 머뭇거리던 찰나, 아버지는 ‘하산할 때 무릎이 아픈 것, 식당가서 주머니에 요지를 챙기는 것, 책 읽을 때 슬그머니 안경을 벗는 것 중에서도 가장 볼품없는 게 세 번째’라며 나름 유쾌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놀랐다. 마침 시내의 큰 안경점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는 동생이 생각났다. 몇 달 전에 그 안경점 앞을 지날 때, 모 회사의 다초점 렌즈 광고가 크게 붙어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사실 아버지는 예전부터 시내에 있는 번잡한 상점을 부담스러워 하셨다. 옷이라도 사 드리려고 함께 백화점에 가면, ‘너희들끼리 보고 와라, 나는 여기서 기다리마’ 하고 엘리베이터 앞 소파에 앉으며 신문을 꺼내들곤 하셨다. 함께 레스토랑에 가면, 딱 식사만
나의 고향은 대단한 시골이다. 누군가가 그 곳을 ‘깡촌’이라고 표현한다면 나는 순간 발끈하겠지만 반박할 지혜는 없다.지금에 비한다면 그래도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절의 내 고향은 꽤나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5일마다 돌아오던 장날이면 서로 먼저 버스에 타려고 악을 쓰시던 할머니들과 고함치던 버스 기사 아저씨…국민학교에 다니던 나는 항상 그 버스 정류장을 지나 옆마을에 있던 학교로 통학했다. 그나마 나는 통학거리가 가까운 편이었다. 14명이었던 우리 반 친구들은 4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다니거나, 누군가가 태워주는 자전거의 뒷자리를 빌려 학교를 다녔다. 요즘 아이들처럼 방과 후에 누구네 집에 놀러가고 함께 누워서 숙제하고…그런 즐거움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든 환경이었다.그렇게 심심하게(?) 국민학교 고학년생이 된 나의 유일한 설렘은 읍내의 중학교에 다니던 언니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우리 집 툇마루에서 까치발을 들고 담장 너머를 바라보면 산모퉁이 사이의 찻길이 보였는데, 빨간 버스의 뒷꽁무니가 보이기 무섭게 신발을 후다닥 신고 언니를 마중가곤 했다. 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