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선박이나 비행기에만 다는줄 알았던 블랙박스를 요즘은 차량에도 많이들 붙이고 다닙니다. 블랙박스는 정해진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들을 녹음 녹화하여 저장합니다. 그 덕에 억울한 뺑소니를 당할 일이 확 줄었지요. 사고 나면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던 이야기가 옛말이 되어갑니다. 그래서인지 도로에서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풍경도 사라졌습니다. 꼼짝못할 증거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요. 블랙박스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성능이 좋아야 합니다. 화소가 떨어져 가해 차량번호나 관련된 사람들의 특징을 분별할수 없다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블랙박스도 촬영 범주가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각지대도 있고, 촬영 범주 밖에서 돌멩이 같은 것이 날아와 차에 손상을 입힌다면 그 또한 무용지물입니다. 이런 한계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최고성능의 완벽한 블랙박스를 소개합니다. 성능도 촬영범주도 완벽하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저장하고 기록하는 블랙박스! 그것은 바로 텅빈 허공입니다. 허공은 완벽한 블랙박스입니다. 나와 너의 모든 것을 한순간도 쉼없이 한 티끌도 빠짐없이 저장합니다. 혼자서 했던 일체의 행동은 물론, 순간순간 마음 먹은것, 생각한
2015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기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으로 흘러가버린,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삶 속에 무늬처럼 남겨진 자취들을 채집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세컨드핸드 타임’은 소비에트 시절을 거쳐온 이들의 속살을 드러내 보여준다. 작가는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을 호모 소비에티쿠스라고 명명하면서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열정은 무엇이었고 그 열정이 사라진 후에 도래한 삶의 실상은 무엇이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다. 스베틀라나는 소설의 들머리 격인 ‘어느 가담자의 수기’에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고 말한다. “아버지들은 자유란 공포가 부재할 때를 말하며, 쿠데타 세력을 제압했던 8월 중의 3일이 그 자유에 해당한다고 대답했다. 또 식료품 가게에서 백 가지 종류의 햄 중 하나를 고르는 사람이 열 가지 햄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사람보다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했다. 얻어맞지 않고 사는 것이 자유지만 얻어맞지 않고 사는 세대는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세컨드핸드 타임, 김하은 옮김, 이야기가 있는집, 20
초심이 없이 사는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재미가 없고 꼬이고 힘듭니다. ‘그 일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던가 하는, 시작할 때 가졌던 그 순수하고 본질적인 다짐, 초심’이 흩어져서 그렇습니다. 상황이 좋거나 나쁘다고 덩달아 변하는 것은 초심이 아닙니다. 의사를 희망한 사람, 교사가 되려던 사람, 정치가를 목적한 사람, 연예인을 꿈꾸는 사람, 사업을 하려던 사람, 무엇을 시작하든 돈이나 인기 권력 너머 그 근원에 초심이 있을 것입니다. 초심을 챙기며 살면 어떤 상황속에서도 스스로에게 점차 힘이 형성되지만, 상황에 흔들리며 살면 결국 그것들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초심을 유지하면 내가 처한 상황이 변해도 마음이 위아래로 널뛰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인기나 지위나 돈이 없다가 있어지거나 있다가 없어져도 마음이 여여합니다. 그것따라 목에 힘들어가지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변할수 있는 하나의 이름표일 뿐입니다. 이름표에 울고 웃는 것은 가여운 일입니다. 인기를 중시하는 사람은 그것이 떨어지면 괴로워서 어찌할바를 모릅니다. 돈좀 있던 사람이 가난한 처지에 놓이면 적응을 못합니다. 지위가 높던 사람이 자기가
모처럼 가족들이 모여도 할 말이 별로 없다.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관심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례적인 안부를 묻고는 입을 꾹 다문다. 그러다가 누구 입에서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는 돌연 활기를 띤다. 대개 실수담이지만 지나간 일이기에 다들 유쾌하게 그날을 떠올린다. 당사자는 전혀 기억에 없는데 다른 이들이 소상히 기억하는 경우도 있고, 서로 상충되는 기억도 있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보면 사건의 전말이 재구성된다. 그런 이야기 속을 헤매다 보면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가족이란 핏줄을 나눈 사람이기도 하지만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 과거는 지긋지긋해서 다시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언제라도 돌아가 쉴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기도 하다.아이들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드는 이야기들은 인생의 내용이 된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삶의 ‘저자’(author)이다. 어떤 이는 그래서 ‘원본’으로 태어나 ‘복사본’으로 살아가는 것을 타락이라 일렀다. 인생의 황혼기를 지나고 있는 어른들께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달라 청하면 별다른 게 없다고
복면가왕. 노래를 잘 못하는 나도 저렇게 하면 남들 앞에서 노래를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프로그램이다. 매회마다 출연자들은 가지각색의 복면을 하고 그에 걸맞는 이름을 달고 정체를 완벽히 숨긴 채 노래한다. 복면을 하고 노래할 때 그들은 본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고, 그 속에서 느낀 혼자만의 감격에 겨워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곤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가장함으로써 가장 자기다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복면가왕이 노래하는 자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인지함으로써 평상시에는 잊고 살던, ‘가면 안에 있는 진짜의 자신’에 오롯하게 집중하는 체험을 하는 까닭이리라. 게다가 청중평가단이나 연예인 패널이나 시청자들이 복면 안의 가수, 즉 ‘진짜 나’에게로 향하는 바로 그 ‘깊은 관심’ 때문이리라. 어떤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은 자유와 기쁨을 주고, 그것을 받지 못한 자리에는 우울한 고독이 들어선다. 놀라운 것은, 우리 모두 이미 가면을 쓴 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잊는다는 사실이다. 복면을 하고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하는 자’는 정확히 말해 누구인가? 그의 몸이, 거기에
올 단풍은 유난히 곱고 선명했다고들 말한다. 팔당댐 주위 드라이브길에 지인들과 함께한 차안은 우와~여기좀 봐, 우와~ 저기좀 봐, 하는 탄성들로 요란했다. 첫단풍을 보겠다고 설악산에 올라서 찍은 사진들은 예술작품이었다. 바닥에 뒹구는 단풍잎마저 예뻐서 줍기도 한다. 단풍이 꽃보다 곱다는 표현이 정말 딱 맞다. 단풍이 아름답다고 할때, 이는 가을의 상징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드러내준다. 우리는 자연의 가을을 곧잘 예찬한다. 실상, 단풍은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낮아지면서 영양과 수분이 부족하여 생기는 노병사의 한 현상이다. 나뭇잎의 입장에서 보면 늙음이며 아픔이며 죽음으로 가는 처절한 모습일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며 감탄하고 기뻐한다. 자연의 노병사를 축복하는 것이렸다. 우리는 사람이나 사람이 만든 것 이외의 것들을 자연이라고 부른다. 정작 자신이, 사람이 자연물임을 전혀 눈치도 못채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자연이 아니고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식물은, 동물은 자연이고 사람은 인위적인 것인가. 아니다. 나의 탄생도 성장도 늙음도 소멸도 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자연의 섭리다. 자연물이 만들어내는 것 역시 자연이라고 명하듯이 사람이 만든 것 또한
홍순관은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느릿느릿 노래하는 가객이다. 어쩌면 태생적으로 세상의 북소리에 발맞추어 살 수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대중들에게도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그의 노래가 달콤하거나 자극적인 소리에 길들여진 대중들의 마음에 파고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의 눈이 향하고 있는 것은 세상의 작은 것들이다. 너무 작아 사람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것들 혹은 사람들이 한사코 외면하려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노래에는 대중들을 숨막힐 듯한 흥분으로 고양시키는 고음이 별로 없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슬픔의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 심성을 파괴하거나 메마르게 하는 정서로서의 슬픔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끄는 슬픔이다. “노을이 물들어 서산에 해지며는/부르던 이 노래도 고향집으로 갈까/이 세월이 가면 고운 노래도/시간에 흩날리어 찾을 수 없게 되오/성모 형 지금이야 우리가 부를 노래/아버지 들려주던 그 노래를 부르오”(성모 형). 함께 노래운동을 하던 성모 형이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허감과 그리움을 이렇듯 가만히 읊조
한문수업 시간에 제일 쉽게 외운 문장이 있다.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공자님 말씀이다. 뜻도 쉽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부모(父母)는 부모답게 자식(子息)은 자식답게 하라.” 앞글자는 역할이나 신분을 나타내고, 뒷글자는 ‘답게 하다’라고 풀이된다. 야, 참 쉽고도 좋은 말씀이로구나 하고 감탄했던 이 문장이 지금은 그 반대다. 내가 어떻게 나 아닌 다른것 다울 수가 있을까. ‘~답게’ 살라는 것이 대체 뭐란 말인가. 임금다운 임금은 어떤 임금이며, 신하다운 신하는 어떠하며, 부모다운 부모는 어떠해야 한다는 걸까? 한번 물어보라. 임금다운 임금이 있으면 손들어보라고, 부모답게 산다고 생각되는 부모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없다! 정확히 ~다운 것에 적합한 사람은 없다. 똑같은 논리로 남자답다, 아내답다, 남편답다, 어른답다, 아랫사람답다…이런 식으로 대입하고 ~답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 물어보라. 누구도 ~다움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움’이란 사실 실체가 없는 허구다. 내가 아닌, 다른것 답게 살라는, 실체도 없는 이 주문은 자책과 우울함을 낳고, ~답지 못한 상대를 비난하게 만들면서 심각한 갈등을 불러온다. 남자답고, 여자답고, 아버지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