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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2>

소설

민혁은 M치과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주임교수인 박병삼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박 교수는 그가 졸업한 치과대학의 은사였다. 연구실은 복도 오른쪽 맨 끝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우측 벽면에 책장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 옆으로 철제서랍장이 있었다.


좌측 벽면에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 지도교수답게 보면대와 기타가 벽에 기댄 채 놓여 있었다. 학생들의 과제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박 교수의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민혁은 《언어중추에 관한 연구보고서》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중간지점에 ‘뇌의 언어중추 영역 브로카 베르니케’라고 적힌 인덱스 부분을 펼쳤다. 책 하단에 다음과 메모가 적혀 있었다. 뇌에서 말을 만들어내는 브로카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혀 보형물 프로토타입(원형, 原型), 말을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B타입, 두 영역 모두 활성화시킬 수 있는 C타입.


잠시 후 박 교수가 연구실로 들어오자 민혁은 서둘러 손에서 책을 내려놨다. 민혁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겨우 가리고 있었고 그는 습관처럼 머리를 왼쪽으로 쓸어 올렸다. 모습은 볼품없었지만 민혁은 평소 학문에 대한 열정과 창의적인 연구를 하는 박 교수를 존경했다.


“오랜만이네. 민혁군. 개업은 했나?”
민혁은 말 대신 휴대폰에 글자를 적었다.


(인천에 있는 보건소에서 근무합니다.)
“혀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혀 보형물을 잃어버렸습니다.)

민혁은 휴대폰을 보여주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떡하다가 그걸 잃어버렸어. 그게 얼마나 공들인 건지 자네도 잘 알잖아. 혀에 이식가능한 하이드로겔에 자네의 줄기세포를 넣어 바이오 잉크를 만들고, 거기에 바이오 플라스틱을 섞어 만든 B타입의 맞춤형 혀를 자네에게 준거란 말일세.”


박 교수가 허탈한 표정을 짓자 민혁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는 휴대폰에 무슨 말인가를 써 내려갔다.
(교수님, 혀가 없으면 보건소에서 쫓겨납니다. 제발 하나만 더 만들어 주십시오.)


“프로토타입의 혀가 있긴 한데 내장된 칩이 자네에게 안 맞을 거야. 거부반응이 있거든.”


프로토타입은 박 교수가 3D 프린터를 이용해 국내 최초로 제작한 혀 보형물이었다. 박 교수는 철제 서랍장을 열고 스테인리스 상자를 꺼내 열어 보였다. 그 안에는 혀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민혁은 재빨리 휴대폰에 글을 쓴 다음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켰다.


(이거라도 안 되겠습니까?)
박 교수는 눈빛이 흔들렸다. 민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목숨을 구걸하듯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그때 책상 위에 인터폰이 울렸다. 통화를 마친 박 교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말했다.


“학장이 나를 찾는군. TV에 출연한 후로 쓸데없는 일이 자꾸 생겨서 말이야. 잠시 다녀오겠네.”


그 말을 남기고 박 교수는 연구실을 나갔다. 민혁은 혼자 방에 남겨졌다. 민혁이 금속상자에 보관된 혀를 꺼냈다. 혀가 없어진 사실을 알고 분노와 배신감으로 일그러지는 박 교수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으나 민혁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제주도에 다녀올 때까지만 잠시 빌리는 거야.’
그는 혀를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박 교수의 연구실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길에 민혁은 주머니에서 꺼낸 프로토타입의 혀를 입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혀가 입안에 들어오자 안정을 되찾은 민혁은 휴대폰에 수신된 문자부터 확인했다. 박 교수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프로토타입의 혀가 없어졌네.)
민혁은 발걸음을 멈춘 뒤 잠시 뜸을 들이다 박 교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도난당하신 건가요?)
집에 돌아온 민혁은 욕실에 들어가 프로토타입의 혀를 붙여보려 애썼지만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얼마 후 박 교수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으나 그는 받지 않았다. 뒤이어 박 교수로부터 문자가 수신되었다.


(경쟁업체의 소행일지도 모르지.)
(제가 운전 중이라서요. 빨리 되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CCTV도 없고 본 사람도 없었던 만큼 그의 절도는 완전 범죄였다. 바로 그때였다. 민혁의 입꼬리가 실룩거리기 시작하더니 입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프로토타입 혀의 마그네틱이 절단된 혀의 키퍼 자리에 철커덕 붙었다. 혀를 전후좌우로 날렵하게 움직이며 입술주위 근육을 풀었다. 곧이어 그는 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걱정할 거 없어. 예정대로 제주도에 가면 돼.”
“어, 오빠 이제 말이 술술 나오네.”

 

 

<다음에 계속 이어집니다>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