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행복을 찾아 나섭니다. 사람들은 대개 행복을 위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사람마다 행복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들이 다릅니다.
우리 선조들은 행복한 삶의 조건으로 오복을 꼽았습니다. 오래 사는 것, 넉넉하게 사는 것, 건강하게 탈 없이 무난하게 사는 것, 덕을 좋아하여 수양하며 사는 것, 그리고 편안하게 죽는 것을 복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는 대개 ‘행복’이라는 개념을 ‘소유’의 양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즉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행복을 따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역시 많이 소유하면 많은 것을 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많은 것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냥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그것이 심리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쉽게 납득할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본래 유다인들은 가난한 자를 싫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할 때 그들은 무능하고 게으르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다인들과 생각하는 것이 아주 비슷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물을 복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보통 마음이 가난하다고 하면 마음이 약해서 남에게 의존적이고 자기 스스로 아무 것이나 잘 결정하지 못하는 심약한 사람을 생각할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나 혹은 마음이 약해서 늘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인 그런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가난"이라는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가난"은 4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의미의 ‘영적 가난" 입니다. 물론 이것은 극복돼야 할 가난중의 하나입니다. 두 번째로는 ‘궁핍"을 지칭하는 가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무시되는 물질 부족의 극단적 형태의 가난입니다. 이것 역시 극복돼야 할 가난입니다. 세번째로는 긍정적 의미의 물질적 가난이 있습니다. 바로 ‘검소" ‘절제"와 같은 말과 바꿀 수 있는 가난입니다. 이런 의미의 가난은 적극 추구해야 할 가난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가난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을 말씀하시되 ‘마음"이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무사(無私)", ‘거룩함"과 같은 말과 바꿀 수 있는 긍정적 의미의 ‘영적 가난’이 있습니다. 이는 ‘자유"와 ‘사랑"의 혼합물로써 다른 이와 하느님을 향한 완전한 자기 ‘헌신"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인생의 행복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참 행복은 항상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창조의 목적에로 돌아가는데 있습니다. 결국 행복은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고 영적인 것도 포함하는 것이며, 마음의 문제라는 점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