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성경 공부를 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수강의를 할 때였습니다. 모든 연수생들은 일년 가까이 그룹으로 성서 공부를 마치고 연수에 참여했기 때문에 수강생들의 열기는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나는 약 200여 명의 연수생들의 눈망울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긴장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앞쪽에 앉은 한 중년의 형제는 산만하게 자꾸 창 밖만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강의하는데 무척 분심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도 그 형제는 여전히 창밖을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자꾸 그 형제가 마음에 걸려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런데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그 형제를 가까이에서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형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습니다. 그분은 제 강의를 더 잘 들으려고 자신의 귀를 저를 향해 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마치 딴청을 피우는 것 같이 보였던 것입니다. 내가 오히려 그 형제를 잘 보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잠시나마 그 형제에게 안 좋은 감정이 들었던 것에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형제는 다른 맹인들과 함께 점자로 1년 동안 성서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때로는 봉사자가 읽어 주는 성서 말씀을 듣고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신부님, 저는 나이가 들어 사고로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읽으면 그전에 눈이 성했을 때 보다 요즘에 오히려 더 많이 보고 느낀답니다.” 그분의 말씀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서 큰 울림으로 메아리쳤습니다.
‘과연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눈뜬 소경’란 말처럼 시력이 성하다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욕심이나 탐욕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마음의 창을 믿음으로 닦아야 합니다. 사랑의 눈, 순결한 마음의 눈만이 참다운 자신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자기’가 되지 못하고 길을 헤매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로 눈이 멀어있는 가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에 우리 자신이 얼마나 세상과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성서에서 바르티매오라는 소경이 등장합니다. (마르코 10장 46절-52절 참조) 그는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며 예수님께 눈물로 간청합니다. 성서에서 자비는 사람들이 갖는 일반적인 동정심과는 다릅니다.
자비란 하느님께서 불쌍한 죄인들에게 끊임없이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게 해달라는 소경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눈을 뜨게 된 소경은 단순한 시력 회복에 그치지 않고 더 깊고 심오한 구원적인 체험을 하게됩니다.
미국의 사회복자 사업가인 헬렌켈러 여사는 “지금 내가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내가 듣고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산다면우리의 삶은 더 행복하고 여유로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삼중의 고통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곱씹어 볼수록 고개가 끄덕여진다.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중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는 마음으로만 진실되게 볼 수 있단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