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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후스의 추억

월요시론

7년 전 이맘때 나는 덴마크 오르후스로 한 달간 연수를 다녀왔다. 그곳 왕립치과대학 카링 교수의 초청을 받아서였다. 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던 유틀란트 반도, 그 동쪽 끝 항구도시 오르후스는 인구나 면적으로 치면 우리나라 강릉시 정도이지만, 덴마크에서는 두 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북위 56도의 북유럽에서 11월에 뜨고 지는 태양은 뭔가에 쫓기듯이 잠시 얼굴을 내밀고는 이내 사라져버린다. 오후 3시가 지나면 어둑해지고,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게다가 체류기간의 절반은 온종일 부슬비가 흩뿌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오면서 ‘좀 더 두꺼운 내복을 가져올 걸’ 하고 후회한 날이 많았다. 그나마 어느 교수님이 ‘내복 꼭 챙겨가라’고 조언해준 덕분에 챙겨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스산한 북구의 11월을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라면과 즉석밥은 큰 위로가 되었다. 쓸쓸한 추위를 이겨내는 데 이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대단한 발명품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도 보름이 지나자 시들해지더니 김치가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포장 김치를 짐에 넣어 오지 않은 나의 오만과 불찰이 크게 후회되었다. 오르후스에 한국 식당이나 한국 식품가게는 당연히 없고, 그럴수록 김치는 더욱 먹고 싶어졌다. ‘설마 한국 사람은 있겠지’ 하는 데 생각이 미치자 손은 벌써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Kim, Lee, Park, Choi… 한국계라고 짐작되는 이름을 모두 골라서 전화를 돌렸으나, 차마 김치 이야기는 꺼낼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을까, 한 집에서 주말 식사초대를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김치찌개와 삼겹살, 거기에 계속 이어져 나온 한국음식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였다.

강릉 경포호수 횟집에서는 일요일 아침에도 전복죽을 먹을 수 있지만, 오르후스 바닷가에는 문을 연 식당이 한 곳도 없었다. 마침 어부가 갓 잡아온 광어를 상자에 부리고 있기에 ‘파는 것이냐, 얼마냐’ 물었더니 우리 돈으로 단돈 5천원 정도라 했다. 4킬로그램은 됨직한 자연산 광어가 그 값이면 당연히 사야 한다. 검정 비닐에 담긴 광어는 제법 힘이 셌다. ‘회를 치고 남은 건 매운탕을 끓여야지’ 생각만 해도 침이 돌았으나, 광어는 잘 죽지 않았다. 겨우 달래서(?) 진정은 시켰지만, 무딘 부엌칼로 회를 친다는 게 예사 일이 아니었다. 두 시간 씨름 후 몇점 광어회를 건진 나는 거의 탈진하였다. 그렇게 그날 카메라에 기록된 광어회는 외과적 치주치료의 부분층판막 강의를 위한 자료 속에 아직 남아 추억이 되어있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려는 그들 노력의 결과였을까? 근대 이후 덴마크와 노르웨이·스웨덴을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지역은 과학 분야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다.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고 노벨상을 만든 노벨, 식물분류체계를 완성한 린네는 이 지역이 낳은 대표적 과학자이다. 치의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임플란트를 고안해낸 브레네마크도 이곳 출신이고, 조직재생술(GTR)을 개발함으로써 상실된 치주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골이 충분치 못한 부위에도 임플란트 시술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이곳 사람 린데와 카링 덕분이다. 캠퍼스 밖에는 북구의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지만, 실험실은 늦은 밤까지 언제나 열기로 후끈했던 곳 오르후스!

올 4월 부임한 마영삼 주덴마크 대사는 다행히 출국 전에 치과치료를 마칠 수 있었다. 마지막 진료날, 7년전 내가 경험했던 오르후스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얇았던 내복과 전화번호부와 김치, 광어회, 그리고 그곳 카링 교수가 이룬 업적 등에 관하여. 최근 마 대사가 한 통의 메일을 보내왔다. 오르후스 출장길에 카링 교수댁을 방문하였다는 내용과 대사가 교수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잊지 않고 챙겨주신 마 대사 덕분에 나의 오르후스 추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구 영 서울치대 치주과 교수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