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이맘때 나는 덴마크 오르후스로 한 달간 연수를 다녀왔다. 그곳 왕립치과대학 카링 교수의 초청을 받아서였다. 학교 지리시간에 배웠던 유틀란트 반도, 그 동쪽 끝 항구도시 오르후스는 인구나 면적으로 치면 우리나라 강릉시 정도이지만, 덴마크에서는 두 번째로 큰 대도시이다. 북위 56도의 북유럽에서 11월에 뜨고 지는 태양은 뭔가에 쫓기듯이 잠시 얼굴을 내밀고는 이내 사라져버린다. 오후 3시가 지나면 어둑해지고,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게다가 체류기간의 절반은 온종일 부슬비가 흩뿌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오면서 ‘좀 더 두꺼운 내복을 가져올 걸’ 하고 후회한 날이 많았다. 그나마 어느 교수님이 ‘내복 꼭 챙겨가라’고 조언해준 덕분에 챙겨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스산한 북구의 11월을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준비해간 라면과 즉석밥은 큰 위로가 되었다. 쓸쓸한 추위를 이겨내는 데 이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대단한 발명품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도 보름이 지나자 시들해지더니 김치가 그리워지기 시작하였다. 포장 김치를 짐에 넣어 오지 않은 나의 오만과 불찰이 크게 후회되었다. 오르후스에 한국 식당이나 한국
미국 연수시절 은사 오킬 교수는 이슬람 교도이다. 몇 년전 그를 서울로 초청해 이태원 이슬람중앙사원을 함께 방문했다. 사원으로 향하는 좁은 골목에는 이슬람 계율에 따라 도축한 하랄 음식을 파는 가게와 아랍어로 쓰인 여러 간판들이 즐비했다. ‘서울에 과연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이국적인 풍경이었다. 마침 금요일 점심 기도시간을 맞은 사원 안은 많은 신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는데, 내 눈에 신기했던 것은 이슬람 경전인 코란을 손에 들고 있는 신자가 한사람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설명으로는 이슬람 교도는 누구나 어릴 때부터 신약성경보다 많은 114장의 아랍어 코란 전부를 외우기에 굳이 두꺼운 코란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몽골에서 만난 우형민 회장의 꿈은 출판사업이다. 20년 전 한국과 몽골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직후 손가방 하나 달랑 들고 울란바타르 공항에 내렸던 그는 조그만 식당을 시작으로 몽골 최대 부동산개발회사인 몽골서울그룹을 일궈냈다. 소탈한 그가 여생의 봉사로 몽골에서 출판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것은 몽골역사가 대부분 구전으로 전승되어 칭기스탄 시대를 비롯한 영광된 역사가 책으로 남아있지 못한 것이 오늘날 몽골인들이 책읽기에 익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