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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숨막히는 거인의 땅

세계 33개국 430일간의 여행길…행복한 시간여행을 찾아서-① 세상의 끝 파타고니아

■글 싣는 순서
1 세상의 끝 파타고니아
2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
3 시간이 멈춘 나라 쿠바
4 세상에 없는 풍경 소금사막 우유니
5 트럭으로 달린 아프리카 남부

장호진 씨(LG Display에서 10년간 근무)와 홍경이씨(한국투자증권에서 9년간 근무). 이들 부부는 2014년 6월. 직장생활 10년 차, 부부생활 5년 차가 되던 해 회사를 그만두고 함께 세계여행길에 올랐다.
이렇게 살아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지금까지의 삶을 지탱해 주던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여행을 떠날 때 아내와 다짐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성과를 내며 살아왔으니 ‘성과없는 1년을 살아 보자’고. 행여 성과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노심초사로 여행길에 올랐건만 결국 33개국 430일간의 여행길에서 이전보다 더 행복해진 자신을 발견하고 관계가 더 견고해진 부부가 된 성과를 얻어 돌아왔다. 본지는 이들 부부의 33개국 여행 여정중 5곳을 추천받아 매주 목요일자에 게재한다.

3개의 거대한 봉우리와
옥빛의 호수 만년설이 녹아
떨어지는  자연의 웅장함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여행길에 오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파타고니아로 떠나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천둥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을 60미터 높이의 페리토 모레노(Perito?Moreno) 빙하, 내셔널지오그래피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봐야 할 50곳’ 중에 하나로 뽑힌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협곡 속에 숨겨져 있는 요새 같은 마을 엘 찰텐(El Chalten) 그리고 거대한 상어 이빨을 연상시키는 파타고니아 최고봉 피츠로이(Fitzroy)까지 우리가 지구 반대편 이 먼 곳으로 여행할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도, 가늠해보지도 못했던 숨 막히는 자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파타고니아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을 포함하는 남미 대륙의 남위 38도 이남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닿아있는 안데스 산맥이 남쪽을 향해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대서양이 닿아 있는 고원이 펼쳐져 있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칠레의 자랑이자 전 세계 트래커들의 로망인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 우리 부부의 첫날 트레킹 코스는 라스 토레스(Las Torres) 캠핑장을 출발해 국립공원의 하이라이트인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를 보고 하산하는 코스였다.

돌산들이 거인처럼 둘러 서 있는 곳을 조망할 수 있는 바세 라스 토레스(Base Las Torres)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트레킹 초입부터 시작된 가파른 돌길은 캠핑용품을 잔뜩 지고 가는 사람들의 어깨를 중력 방향으로 짓눌러댔다.

하지만 진정 어려운 코스는 토레스 캠핑장(Campamento Torres)을 지나 목적지까지 마지막 한 시간 코스였다. 지그 재그로 만들어 놓은 돌산 길. 마치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처럼 아무리 걸어도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아내의 입에서 더 이상 못 가겠다는 말이 선언되기 직전 우리는 언덕을 넘어 섰고 입이 벌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세 개의 봉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서 있던 라스 토레스 전망대(Mirador Las Torres)가 해발 1천 미터였고 세 개의 봉우리들은 2천 8백 미터 정도이니 눈앞에서 1.8km의 높이로 거대한 탑이 서 있는 광경이었다.

아내는 이내 “이렇게 힘든 모든 상황이 용서된다”고 했다. 이곳은 거인들의 땅이다. 1520년 마젤란이 파타고니아를 탐사 할때 대원 중의 하나였던 안토니오 피가페타는(Antonio Pigafetta) 자신들의 키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거인 원주민들을 만났다는 기록을 남겼다. 세 개의 거대한 봉우리와 옥빛의 호수가 만들어 내는 풍경은 500여 년 전 마젤란과 탐험 대원들이 보았다는 그 거인이 저 멀리 걸어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이질적이고 웅장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한번 이 캠핑장에서
행복한 고립을 자처하는
날을 맞이 할 수 있을까?


신들의 원형 경기장 같아 보였던 거대한 화강암이 끌어안은 호수 안으로 봉우리들 아래에 쌓인 만년설이 녹아 십 수개의 물줄기가 되어 떨어지는 풍경이 이곳을 더욱 신비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고요와 자연의 웅장함 앞에서 우리는 그저 그 앞에 서 있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자연을 바라보는 일이 할 일의 전부였던 그 때, 우리의 협소한 자아가 위로받으며 동시에 거인처럼 확장되고 있었다.


캠핑장에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조금씩 거세지고 있었고 텐트가 날아가지 않도록 머리보다 더 큰 돌들을 주워다가 지지대를 고정해야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바람이 더욱 세게 불어왔다. 산을 통과해 불어오는 바람은 소리가 먼저 들렸고 곧바로 누워있는 텐트를 쳤다. 마을에서 빌려온 싸구려 텐트는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의 집처럼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내는 이 여행을 떠나 오기 전 배낭여행은 커녕 텐트에서 자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심 아내가 걱정되었다. 그런데 광풍이 부는 캠핑장에 위태롭게 서 있는 텐트에 누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기 시작했다. 한국의 어느 부부가 함께 이런 경험을 할까 싶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 아주 사소한 일들이 우리의 관계를 어지럽힐 때 그저 웃으며 극복할 힘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뻬호에 호수와 갈대밭에 환호

족이 떠오른 곳은 뻬호에(Peho?) 호수에 닿아 있는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 산장에 도착해서였다. 뻬호에 호수와 갈대밭은 ‘나는 원래 이런 색이야’하고 자랑하는 것 같이 옥빛으로 금빛으로 넘실댔다. 가족들이 모두 이 곳에 모여 감탄하고 환호하는 상상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왔다는 증거와 추억이 가족 모두의 것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상상.

파이네 그란데(Paine Grande) 산장에는 금세 새로 들어온 트래커들의 텐트가 알록달록하게 캠핑장을 채웠다. 동시에 누군가는 거대한 바위산을 향해 캠핑장을 떠나고 있었다.

문명이라고는 나무로 지어 놓은 산장이 전부인 이 완벽한 자연의 공간은 너무나 바쁘게 살아내야 하는 한국의 생활을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아름답다고 소문난 자연을 보기 위해 남미의 땅끝까지 ‘고립’을 자처해 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립’은 이 자연 한가운데 있는 우리에게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던 나의 이전 삶 속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떠나야 할 시간을 스스로 정하고 떠나거나 캠핑장에 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감동스러웠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가족들과 함께 이 캠핑장에서 행복한 ‘고립’을 자처하는 날을 맞이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