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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오지연의 Dental In-n-Out

일요일 저녁의 결혼식은 이래저래 썩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기 쉽지만 일단 식장에 들어가 앉을 수만 있다면 반전의 묘미도 있다. 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그저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자면 되는 거구나 하는 흐뭇한 자각에 옆 사람과의 서먹한 인사에도, 들려오는 다른 하객들의 대화에도 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하는 그런. 잘 지냈냐는 인사에 “그럼!” 이라고 하면 거짓말이 섞인 것일 테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했다간 기나긴 설명이 필요해 질까봐, 뭐 그냥 그저 그렇다며 얼버무리는 웃음 띤 얼굴들과 거들기라도 하듯 그 주위를 감싸는 부드러운 조명들, 멋진 포즈지만 표정만은 애써 무심한 듯 도도한 꽃들의 그윽한 향기 등등은 살짝 눈만 감아도 금세 분별의 자물쇠와 집착의 빗장을 풀게 할 만큼 일요일 저녁의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
친척, 학교동창 혹은 옛 직장동료들은 저마다 소곤소곤 한 때 자신들과 꽤 깊은 관계였던 신랑 신부 혹은 그 부모들과의 에피소드들 얘기로 여념이 없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나름대로 잘 적응은 하고 있지만 모두 어느 만큼씩은 그리움을 앓고 있던 이들이 젊은 한 쌍의 결혼 축하를 계기로 모여 그간의 안부와 꽃향기와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거의 디아스포라의 현장이 아닐까 가끔 생각한다. 한동안 멀리 다녀왔건만 이곳은 역시 예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구나 싶어 안도하는 듯한 하객들의 표정이 우선 그렇고, BC 6세기 유대인들의 離散으로부터 실로 막대한 시공을 건너 왔음에도 여전히 모세의 십계명을 방불케 하는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주례사가 버젓이 낭독될 뿐 아니라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점 등등을 보더라도.

정작 먼 길을 떠나려는 당사자들은 오늘의 새로운 한 쌍이겠다. 운명은 돌연 이들이 만나 오늘 여기까지 오게 했겠지만, 여기서부터의 아무것도 아직은 말해주지 않고 있다. 難民이 아니라면 21세기의 디아스포라는 철저히 개인의 실존적 문제이다. 다름을 받아들이고 본질에 공감해주고 따뜻하게 환대해 주는 사회분위기(“시댁이나 처가의 분위기”를 확대 및 미화 하려는 노력!)뿐만 아니라,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롭고 용기 있는 개인의 마인드가 포인트. 애써봐야 바뀔 수 없는 것들은 과감히 뛰어넘고, 더 아름답고 훌륭한 쪽이라는 확신이 드는 방향으로 성실하게 다가가려는 빅 픽처 그리기라고나 할까. 바라건대 흔히들 선망하는 특정지점보다는 자신만의 소중한 장소를 향해 날아가는 자유롭고 총명한 민들레 홀씨들이 되시기를.
신부아버지인 대학선배님께도 축하를 드립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끝날 때까지 내내 훌륭한 예식이었어요. 비록 그 분이 나타나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시진 않았지만, 하긴 근래 들어서는 어디에고 직접 오시진 않는다는 소문이더군요. 짐작으로 그 분 마음을 헤아릴 뿐이라지만 어차피 책으로 다 알려져 있는 내용인데 아무렴 어떻습니까. Peace.

신랑신부 친구들 기념 촬영 하러 나오라는 사회자의 말에 갑자기 한 선배가 일어나려다 말았다. 신부 아버지의 친구인 자신을 신랑친구로 착각한 것이다. 삽시간에 솟아난 전우애로 위로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한마디씩을 건넨다. 나도 가끔 그런다니까. 나도 물론… 그리고 나머지 당혹감을 단숨에 사라지게 한 경쾌한 한마디. 아까 사회자가 신랑이랑 자기 키가 2m 좀 안되니까 똑같다고 했듯이 100살 안 되는 사람들끼린 어차피 그냥 다 친구야.
브라보. 이거야말로 진정한 빅 픽처 로군요.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오지연
오지연 치과의원 원장
서울치대 치의학대학원 동창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