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모든 존재하는 것이 하나라고 함으로써 생성, 소멸, 운동, 변화하는 세계를 부정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숙제를 남깁니다. 어떻게 하면 파르메니데스가 그어 놓은 ‘있는 것은 생성, 소멸, 운동, 변화하지 않는다’란 선을 넘지 않으면서 우리 눈앞에서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설명할 것인가. 이 숙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한 철학자들을 우리는 ‘다원론자’라고 부릅니다. 존재하는 것이 생성,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놓음으로써 운동하는 세계를 구했다는 것이죠.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가 그들을 대변합니다.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원리를 상정하는 것은 이론의 효율성이나 정합성의 측면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선택임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족보를 뒤져 최초의 조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듯이, 만물이 발생한 최초의 지점을 찾아 그것을 기원이자 원리로 삼았던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의 생각은 그만큼 또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시초가 되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환원주의적 설명방식이 갖는 매력도 큽니다. 사실 어떤 학문이든 잡다한 세상의 다양함을 원리적
“제논은 엘레아의 참주인 네아르코스를 축출하고자 했으나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는 네아르코스에게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의 혀를 물어 끊어 그에게 뱉었고, 그러고는 맷돌에 던져져 으깨어져 가루가 되었다.” 수다(Souda) 또는 수이다스(Souidas)라고 하는 10세기 말 비잔틴에서 편찬된 일종의 그리스 백과사전의「제논」항목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제논입니다. 거북이와 토끼 또는 아킬레스를 경주시키고,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앞서 출발한다면 결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고 했다던 그 제논이 맞습니다. 이 사람만이 아닙니다. 제논이 살던 도시 이름을 딴 철학학파인 엘레아학파에는 멜리소스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제논과 달리 사모스 사람이었던 그는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함대를 이끌고 사모스를 쳐들어갔을 때, 장군의 직을 맡아 페리클레스의 함대를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그리고 그는 제논 못지않게 우리가 보는 상식적 세계를 부정하며 “그러므로 이처럼 있는 것은 영원하며 무한하고 하나이며 전체가 같다. 그리고 그것은 소멸하지도 더 크게 되지도 재배열되지도 고통스러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자연학」3권 18절 중)라고 말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유명한 경로는 ‘피타고라스 정리’일 것입니다로 표현되는 피타고라스 정리는 직각 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의 길이가 갖는 비례관계를 나타내는 수식이죠. 직각을 끼고 있는 각 변을 각각 a, b라고 하고, 직각을 마주보는 빗변을 c라고 했을 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이, a와 b의 길이가 달라지면 자연히 c의 길이도 달라집니다. 거꾸로 c의 길이를 고정해 놓고 a의 길이를 늘린다면 b는 길이가 줄 것이고 그 반대로 하면 반대의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피타고라스보다 이미 천년 전에 이 세 변의 길이들 사이에 일정한 비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증명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피타고라스 역시 이것을 증명했는지는 논란거리가 됩니다. 피타고라스가 발견했다고 알려진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서양의 온음계가 바로 그것이죠. 피타고라스 정리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피타고라스 당시에 이미 알려져 있던 것이라서 피타고라스의 발견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피타고라스 정리와 마찬가지로 수적 비례관계입니다. 바이올린이나 기타의 줄을 팽팽하게 걸고 그냥 퉁겨서 낸 소리와 그 줄 길이의 2/3가 되는 지
탈레스는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느라 그만 우물에 빠져 어느 하녀로부터 “밤하늘의 별은 보면서, 어찌 발밑의 우물은 못 보십니까?”라고 비웃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 탈레스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에서 최초로 철학을 시작한 철학자라고 합니다. 그에 따르면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고전을 읽다보면 우리가 보기에 너무 뻔하거나 허무맹랑한 말을 읽게 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고전적 상상력’입니다. 그 때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들처럼 생각하는 것이죠. 그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하던 시절은 신화적 사고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입니다. 지상에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는 대략 인간의 경험과 기술로 해결하지만, 천재지변과 같이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던 시절에 인류는 기우제를 지내고 천벌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상의 삶을 설명하는 말과 초자연적 세계를 설명하는 말이 달랐고, 후자의 언어와 사고가 신화이고 신화적 사고입니다. 탈레스의 저 한심한 말은 두 개로 갈라진 세계를 하나로 묶으려는 대담한 기획이었습니다. 지상의 언어인 ‘물’로 초차연적 세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려던 것이었죠.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