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알파고가 화두였다. 터미네이터가 마지막으로 했던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는 말과 장면이 생생히 떠오른다. 터미네이터는 가상이었지만 인공지능 알파고는 전 세계가 지켜보았던 엄연한 현실이다. 인류가 알파고에 그토록 관심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나마 바둑이라는 가장 신사적인 싸움으로 선보여서 망정이지 최고실력을 가진 한 사람의 인류 대표가 인공지능체와 벌이는 격투기 생중계였다면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런 인공지능체가 주는 공포는 두가지로 와닿는다. 첫째는, ‘기계적임’이다. 어떤 것이 같은 패턴으로 끝없이 반복될때, 혹은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기계적이다’는 말로 표현한다.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기계적이다. 같은 패턴을 지치지 않고 무한 반복할수 있으며, 게다가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 무자비하다. 극미한 가능성이라도 남아있다면 결코 봐주는 법 없이 끝을 볼때까지 지속되는 그 기계적임 때문에 먼저 지쳐 쓰러지는 쪽은 ‘인간적인’ 인간이다. 아마도 바둑이 시간제한 없이 계속되는 게임이라면 언제까지라도 기계적으로 반복되었을 것이다. 사람대 사람은 그 전에, 어느정도 승부가 보이면 포기하거나 더 실력이 있는 상대를 존
대형 선박이나 비행기에만 다는줄 알았던 블랙박스를 요즘은 차량에도 많이들 붙이고 다닙니다. 블랙박스는 정해진 범주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들을 녹음 녹화하여 저장합니다. 그 덕에 억울한 뺑소니를 당할 일이 확 줄었지요. 사고 나면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던 이야기가 옛말이 되어갑니다. 그래서인지 도로에서 손가락질하며 싸우는 풍경도 사라졌습니다. 꼼짝못할 증거가 있으니 그럴 필요가 없지요. 블랙박스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성능이 좋아야 합니다. 화소가 떨어져 가해 차량번호나 관련된 사람들의 특징을 분별할수 없다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또한 아무리 좋은 블랙박스도 촬영 범주가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각지대도 있고, 촬영 범주 밖에서 돌멩이 같은 것이 날아와 차에 손상을 입힌다면 그 또한 무용지물입니다. 이런 한계점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최고성능의 완벽한 블랙박스를 소개합니다. 성능도 촬영범주도 완벽하고, 심지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저장하고 기록하는 블랙박스! 그것은 바로 텅빈 허공입니다. 허공은 완벽한 블랙박스입니다. 나와 너의 모든 것을 한순간도 쉼없이 한 티끌도 빠짐없이 저장합니다. 혼자서 했던 일체의 행동은 물론, 순간순간 마음 먹은것, 생각한
초심이 없이 사는 사람은 일을 하면서도 재미가 없고 꼬이고 힘듭니다. ‘그 일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했던가 하는, 시작할 때 가졌던 그 순수하고 본질적인 다짐, 초심’이 흩어져서 그렇습니다. 상황이 좋거나 나쁘다고 덩달아 변하는 것은 초심이 아닙니다. 의사를 희망한 사람, 교사가 되려던 사람, 정치가를 목적한 사람, 연예인을 꿈꾸는 사람, 사업을 하려던 사람, 무엇을 시작하든 돈이나 인기 권력 너머 그 근원에 초심이 있을 것입니다. 초심을 챙기며 살면 어떤 상황속에서도 스스로에게 점차 힘이 형성되지만, 상황에 흔들리며 살면 결국 그것들이 나를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초심을 유지하면 내가 처한 상황이 변해도 마음이 위아래로 널뛰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인기나 지위나 돈이 없다가 있어지거나 있다가 없어져도 마음이 여여합니다. 그것따라 목에 힘들어가지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로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언제나 변할수 있는 하나의 이름표일 뿐입니다. 이름표에 울고 웃는 것은 가여운 일입니다. 인기를 중시하는 사람은 그것이 떨어지면 괴로워서 어찌할바를 모릅니다. 돈좀 있던 사람이 가난한 처지에 놓이면 적응을 못합니다. 지위가 높던 사람이 자기가
복면가왕. 노래를 잘 못하는 나도 저렇게 하면 남들 앞에서 노래를 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프로그램이다. 매회마다 출연자들은 가지각색의 복면을 하고 그에 걸맞는 이름을 달고 정체를 완벽히 숨긴 채 노래한다. 복면을 하고 노래할 때 그들은 본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고, 그 속에서 느낀 혼자만의 감격에 겨워 기쁨의 눈물을 쏟아내곤 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로 가장함으로써 가장 자기다움을 회복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복면가왕이 노래하는 자를 감동시키는 이유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인지함으로써 평상시에는 잊고 살던, ‘가면 안에 있는 진짜의 자신’에 오롯하게 집중하는 체험을 하는 까닭이리라. 게다가 청중평가단이나 연예인 패널이나 시청자들이 복면 안의 가수, 즉 ‘진짜 나’에게로 향하는 바로 그 ‘깊은 관심’ 때문이리라. 어떤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은 자유와 기쁨을 주고, 그것을 받지 못한 자리에는 우울한 고독이 들어선다. 놀라운 것은, 우리 모두 이미 가면을 쓴 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잊는다는 사실이다. 복면을 하고 노래를 부를 때 그 ‘노래하는 자’는 정확히 말해 누구인가? 그의 몸이, 거기에
올 단풍은 유난히 곱고 선명했다고들 말한다. 팔당댐 주위 드라이브길에 지인들과 함께한 차안은 우와~여기좀 봐, 우와~ 저기좀 봐, 하는 탄성들로 요란했다. 첫단풍을 보겠다고 설악산에 올라서 찍은 사진들은 예술작품이었다. 바닥에 뒹구는 단풍잎마저 예뻐서 줍기도 한다. 단풍이 꽃보다 곱다는 표현이 정말 딱 맞다. 단풍이 아름답다고 할때, 이는 가을의 상징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드러내준다. 우리는 자연의 가을을 곧잘 예찬한다. 실상, 단풍은 해가 짧아지고 기온이 낮아지면서 영양과 수분이 부족하여 생기는 노병사의 한 현상이다. 나뭇잎의 입장에서 보면 늙음이며 아픔이며 죽음으로 가는 처절한 모습일 수 있는 그것을 우리는 아름답다며 감탄하고 기뻐한다. 자연의 노병사를 축복하는 것이렸다. 우리는 사람이나 사람이 만든 것 이외의 것들을 자연이라고 부른다. 정작 자신이, 사람이 자연물임을 전혀 눈치도 못채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자연이 아니고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식물은, 동물은 자연이고 사람은 인위적인 것인가. 아니다. 나의 탄생도 성장도 늙음도 소멸도 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자연의 섭리다. 자연물이 만들어내는 것 역시 자연이라고 명하듯이 사람이 만든 것 또한
공원 공터에서 쑥이나 봄나물을 캐는 아주머니들이 있다. 사실 그다지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분들을 그냥 아주머니로 볼 때는 그랬다. 그러나 누군가의 어머니로 보았을때 그 행위에 대한 해석은 완전히 달라졌다. ‘아주머니들’이라고 읽었을때는 ‘개념없음’이나 ‘무조건 취하고 보는 욕심’의 행동으로 해석했었고, 그래서 별로였다. 어느순간 아주머니를 누군가의 어머니로 바꿔 생각하자 그 행위는 가족에 대한 사랑, 혹은 거룩함으로도 읽혀졌다. 그런 어머니들의 행동은 자신의 이미지관리 차원을 넘어서 있다. 먹여살림의 거룩하고 절박한 몸짓이다.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기관리가 우선이었다면, 역으로 지구상의 모든 가족과 자녀들의 이미지는 엉망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재밌는 확대해석을 해본다. 자신은 어떻게 보여도 아랑곳하지 않는 어머니들이란 곧 우리가 보기 좋지 않게 여기는 아주머니들의 또다른 얼굴인것 같다.이쯤에서, 서울에서 대학원과정을 밟고 있을때 한번씩 올라오셨던 우리 어머니가 떠오른다. 오실 때마다 인절미를 해서 양손에 한보따리씩 싸든 채 뒤뚱뒤뚱 버스에서 내리시는 모습을 볼때면 퍽 유쾌하지 않았다. 그것을 내가 들어야 하는 것도 마땅치 않았고, 무거운 것 들고 다
외롭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비용을 내고 친구를 빌려쓰는 ‘프렌드 렌탈’ 상품의 등장은 참 서글픈 우리시대 자화상입니다. 이성간에도, 집안에서도, 어느 작은 모임에서도 외톨이 된 느낌이 들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오지 않거나 자꾸 자리를 뜬다면 주밀한 자기점검이 필요합니다. 걸핏하면 자기 얘기, 자기 자랑 하려고 벼르고 있다가, 모든 화제를 기-승-전-자기자랑으로 끌어가는 것이 혹 내 얘기는 아닌가! 듣는척만 하면서 대충 흘려듣는다거나, 끼어들 타이밍만 보거나, 빨리 말을 좀 끝내줬으면 하는 잡념으로 상대의 말을 듣고 있다면, 설령 세련된 청취의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 해도 공감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자기자랑 한다고 남들이 다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남들을 들러리나, 자기 아래로 보는 마음이 있다면 상대는 귀신같이 느끼고 자리를 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으로 하는 자기자랑이 문제입니다. 상대를 나보다 낮게 보지 않으면서 하는 자기자랑은 좀 다릅니다. ‘나는 원래 잘해’ 하는데도 상처받기 보다는 귀엽고 순수하고 경쾌하게 느껴집니다. 침울한 기운으로 자기표현 안하는 사람들보다 이런 이들이 더 인기가 있기도 합니다. 친구를,
베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베틀에 날실과 씨실을 번갈아 교차시키면서 하나의 천이 짜여진다. 날실만으로도, 씨실만으로도 천이 되지 못한다. 그 둘은 필연적으로 번갈아가며 교차되어야만 한다. 우리네 인생도 꼭 그렇다. 기분 좋고 수월하게 해주는 날실같은 상황과 힘들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씨실같은 상황이 왔다갔다 하면서 인생이라는 천이 짜여진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인생은 본디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다! 어느 인생도 날실만 있거나 씨실만 있지 않다. 제아무리 조건 좋아보이는 사람도 그 사람만이 감내해야할 힘겨움들이 오고가기 마련이다. 살다보면 그렇다. 때로는 수월하고 내 뜻대로 되다가도 어느순간 기분이 가라앉고 일이 꼬이고 절망적인 상황이 꼭 온다. 그러다 다시 기분좋은 일이 생기고, 또다시 예상치 못하게 힘겨운 일이 가로질러 간다. 그렇게 번갈아가며 우리네 모든 인생은 만들어진다. 사실 씨실이건 날실이건 실 자체로는, 즉, 그 일이나 상황 자체로는 좋고 나쁨을 말할 수 없다. 정확히 이것이 좋은 일이라고, 또는 불행한 일이라고 그 누가 단정할 수 있으랴. 지나고 나면 꼭 그것의 역전이 일어나지 않던가. 다만 그 순간에 그것에 어두울 뿐. 그러니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