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에 우연히 필리핀 의료봉사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대한여자치과의사회(이하 대여치)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20대의 새내기 치과의사였던 나는 국내외 이동 진료소에서 소소하게 의료 봉사를 했던 약간의 경험을 가지고 겁 없이 따라나섰는데, 많은 선배 여성 치과의사들이 명절 연휴에 가정을 뒤로 한 채(무려 설 연휴 기간이었다.) 진료 봉사에 열정을 표하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때 받았던 깊은 인상을 글로 표현하여 대여치 이사회 때 객원 멤버(?)로서 발표도 하고 치의신보와 대여치 소식지에 글을 실기도 하면서 대여치 활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의료 봉사를 통해 인연을 맺은 만큼, 나에게 있어 대여치는 항상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일을 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해외 의료 봉사에도 매년 따라나서곤 했는데, 3년 전에 개원하게 되면서 한동안 참석하지 못하다가 이번 2019년도 캄보디아 파일린 해외 봉사에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시간적, 심적인 여유가 그다지 없는 상황인 만큼, ‘어영부영하지 말고 의미 있는 일을 하나라도 더 하고 오자.’는 다짐 덕분이었을까, 특별히 ‘힘들다, 피곤하다’는 느낌도 거의 받지 못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세상의 모든 꽃들이 다 결실을 맺을 필요는 없다. 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더구나 자신과 같은 비숙련자가 - 비록 식물이라고는 하나 종자를 남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거창한 다른 개체의 문제에 관여하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A는 더 이상 자신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인공 수정에 실패하면 리톱스 화분도 다시는 보지 않게 될까. 아버지의 무심한 목소리가 파동이 되어 조용히 허공을 갈랐다. A는 그 파동에 자신이 쨍하니 울리는 감각을 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열심히 노란 꽃술에 붓질하던 자신의 모습이 물결처럼 일그러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A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자신의 딸을 데리러 왔던 B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운동회 날, A의 어머니는 멀찍이서 양산을 쓰고 서 있던 B의 어머니에게 여기 와서 같이 앉자고 말했다. A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다가 B의 어머니가 다가오자 좀 더 구석으로 당겨 앉았다. B의 어머니는 눈인사를 하며 돗자리에 앉았고 A의 어머니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새 보니 마당에서 고추를 말리던데 고추 농사도 짓는지 몰랐다, 그런 이야기를 A의 어머니가 했던 것 같다. 그런데 B가 달리기를 하다가
B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A가 이사를 온 지 2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A는 편의점에서 재고 정리를 하던 중이라 B가 보낸 스마트폰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 못했다. 일을 끝내고 확인했더니 오후 5시쯤에 잠깐 오피스텔에 들렀다가 돌아갈 거라는 내용이었다. 시계를 보았더니 오후 4시를 약간 지난 시간이었다. A는 점장에게 인사를 하고 곧바로 오피스텔로 올라와 방 정리를 했다. 그동안 손도 대지 않았던 캐리어에서 책들을 꺼내 대충 비어 있는 책장에 꽂았다. 냉장고에 보관 중이었던 편의점 도시락도 모두 꺼내 버렸다. B는 오후 5시 반쯤, 부스럭거리는 큰 비닐 봉투를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 A가 문을 열었더니 B는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이었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니? 에어콘 좀 틀고 있지 그랬어.” B가 익숙한 손동작으로 리모컨을 조작했다. “사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지금 막 들어온 참이거든.” “너 아르바이트 하는구나. 어디서?” “여기, 바로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 거기? 일하기 편하긴 하겠다. 그런데 거기 은근히 손님이 많아. 바로 앞에 흡연 부스가 있어서 그런가.” 그건 B의 말이 맞다고, A는 생각했다. 유난히 담배를 찾는 손님이
그것은 실로 특이한 식물이었다. 독특한 문양을 가진 자갈돌을 촘촘히 박아놓은 것 같기도 했고 탈피를 앞둔 갑각류가 납작하게 엎드린 채 무리를 이루고 있는 듯도 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 식물에 대해 꽤 지식이 있다고 자부했던 A였기에 이 낯선 식물에 대한 호기심은 적지 않았다. A는 화분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그 식물을 만져 보았다. 차갑고 매끈했다. “그거 화분 말이야, 진짜 예쁘지 않아?” B가 화장대 거울 속에 비친 A에게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화분이 예쁘다는 뜻인지, 이 독특한 식물이 예쁘다는 뜻인지, A는 헷갈렸다. B는 거울을보며 선물로 받았다는 새 귀걸이를 조심스럽게 끼우고 있는 중이었다. B는귓불이 약해서 새로운 귀걸이로 갈아 낄 때마다 상처가 나곤 했다. “응, 예쁘다. 그런데 이건 다육식물인가? 이름이 뭐야?” “뭐라더라? 저기 파일에 보면 사진이랑 이름 있어. 한번 봐봐.” B는 익숙하게 화장 솜으로 귓불을 꾹 누르며 책상 위에 있는 파일을 가리켰다. B는 시내의 이름난 꽃집에서 매주 ‘그린 인테리어’ 수업을 듣고 있었다. 요즘 강남의 젊은 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실내 조경에 대한 지식을 배우고 직접 화분을 만들거나 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