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가 전단을 하나 받았다. 헬스장 안내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락커가 있고, 샤워장이 있고, 넓은 트레이닝 장이 있고… 마침 PT 받을 곳을 찾던 차에, 여길 가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단을 들고 체험 레슨을 받으러 갔다. 트레이닝 장에 들어서서 보니 운동기구가 좀 단출했다. 역기와 봉, 덤벨, 그리고 커다란 공 같은 것들이 있었다. 마침 한 타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공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올리려고 기를 쓰는 청년들을 보았다. 몸도 마음도 건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실에 들어가서 체험 레슨을 하러 왔다고 말을 했는데, 트레이너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PT는 없고, 다같이 운동하는 곳이라고 했다. 일단 왔으니까 하루 체험을 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운동복을 챙겨 입고, 트레이닝 장에 모인 사람들에 합류하였다. 다들 경험이 많아 보였다. 단 한 사람, 나처럼 체험 레슨을 하러 온 작은 여학생이 있어 나와 한 조가 되어 운동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듣도 보도 못한 크로스핏을 하게 되었다. 크로스핏은 일단, 참으로 격한 운동 방식이었다. 주로 2인 1조가 되어 운동을 하게 되는데 서로 번갈아 가며 운동을 한다.
재가 노인들(100만명, 2023년 기준)에게 노인장기요양보험이 보장하는 구강중재는 치과의사 지시서 작성에 따른 치과위생사의 방문구강간호로 거의 사문화된 상태이다. 하지만 지난 연말 여야 의원들이 발의한 7개 지역사회 통합돌봄 법안이 ‘의료-요양의 통합 지원을 위한 법률’이라는 보건복지위원장 단일안으로 보건복지위원회 상임위원회를 통과했다. 조만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본회의 문턱을 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국립치의학연구원 설립에 이어 치과계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이 법 제15조 제1항과 제6항에 재가 노인의 ‘방문 치과진료’와 ‘방문 구강관리’ 내용이 명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치과 내원과 구강관리가 어려워 방치되었던 구강을 위한 방문진료가 가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곧 진행될 방문구강진료를 위해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이하 수원병원) 재택의료센터의 시범 사업으로 진행된 필자의 재가 노인 구강진료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 과거력 및 복합투약 평가 중요 대상자(95세 여성)는 장기요양 2등급 판정을 받고도 요양시설에 가지 않고 70대 아들 부부 집에서 와상(臥牀)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식사
출근길, 눈꽃 대신 서리꽃이 피었습니다. 안팎으로 기온 차이가 심할 때 생긴다고 하는데, 겨울이 다 된 지금도 꽃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충만한 에너지가 서리꽃을 피웠겠지요. 맨날 꽃만 찍는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도망가는 첫째, 빨개진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둘째보다, 이리저리 쉼 없이 찍어도 군말 없이 모델을 해주기로는 으뜸이 꽃입니다.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보기 가능합니다. 꽃과 자연이 아름다운 서리꽃을 만들 듯, 넘치는 즐거움과 사랑이 아름다운 미소로 나타납니다. 꽃보다 사람을 더 많이 담고 싶습니다. 서리꽃 대신 웃음꽃이 가득 피어나는 사람을요. 한진규 치협 공보이사
지난 3년여 세월 동안 전화도 받지 않으시고, 서로 즐겁게 소식을 전하며 소통했던 카톡을 아무리 보내도 응답이 없어 걱정 속에 마음을 애태웠는데 2023년을 하루 남겨놓은 지난 12월 30일 선배님의 큰 아드님으로부터 온 카톡 부고를 보고 망연자실 앞이 캄캄했습니다. 90이 넘어 노익장을 과시하며 몸과 마음이 강건하시던 선배님이 그날도 환자를 몇 명 진료하시고 후배분과 저녁 자리에 나가시려다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로 거동도 못 하시고 코마 상태, 인지력도 없는 채 1041일의 긴 투병 생활을 하시다가 마음 줄을 놓으시고, 95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셨다는 소식에 애통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선배님은 1927년 경기도 용인 출생, 1949년 서울치대 3회 졸업, 1950년 군의관으로 입대, 1955년 훠트오르(FortOrd) 및 1960년 월터리드(WalterReed) 병원에서 구강외과와 치과 고등교육반 이수, 1966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셨습니다. 또 1967년 치과기재학회 3~5대 회장·고문, 구강보건협회 부회장·감사·고문, 1969년 예비역 치과 군의관 대령, 치협 감사, 1974년 치협 총무, 1978년 인공치아이식임플란트학회 1~2대 회장
냇가에서 고무신 배 띄우기 놀이하던 추억의 검정 고무신, 필자의 어린 시절엔 다수가 말표(상품명) 검정 고무신을 신었으며 여자신발은 고무신 모서리 부분에 촌스런 꽃무늬가 그려져서 구분되었다. 형편이 조금 나으면 흰색 고무신을 신었으며 그 중 부잣집 아이들은 운동화를 신기도 했고 부러워한 기억이 난다. 검정 고무신이여도 처음 신을 땐 발이 좀 아팠지만 새 신이어서 기분은 좋았다. 좀 신다보면 발이 적응하여 편해졌으며 사시사철 검정 고무신이여서 겨울에는 지면과 맞닿아 유독 발이 시렸고 동상에 걸린 사람들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특히 겨울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교장 훈시 들을 때 발을 동동 굴렸던 기억들을 요즘 아이들이 들으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며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주로 맨발로 다녔기에 신발이 닳아 바닥이 얇아지면 지면에 닿는 가려움과 마찰에 의한 따가움이 합쳐져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결국 신발에 구멍이 날 때까지 신다가 새 신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들… 오래 신으면 늘어나기도 하고 구멍도 나서 달리다가 잘 벗겨지고 발바닥이 까지기도 했다. 필자는 전교생이 상당히 많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신발장이 초등학교 교실 복도에 있었는데 검정 고무신이
캄보디아 씨엠립으로 진료 봉사를 다녀왔습니다. 처음 병원에서 좋은 기회를 제안받고는 별 감흥이 없었는데 막상 출발이 가까워져 오니 걱정이 앞섰습니다. 주된 걱정 가운데 하나는 현지에 대한 이해도, 즉 현지의 상황을 너무 모르고 막연하게 출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현지의 기후, 치안, 물가 등 정보는 인터넷을 통해 충분히 확인이 가능하지만, 여행이 아닌 진료 봉사를 목적으로 제가 사전에 알고자 했던 현지의 구강건강 관련 정보는 확인이 불가능한 수준이었습니다. 개개인의 구강건강상태가 심각하여 수복과 발치를 끊임없이 할 것이라는 막연한 수준의 정보에, 그만한 각오를 다지며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새벽 두 시에 강릉에서 집결하여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 하노이를 경유해 씨엠립에 이르는 여정은 말 그대로 멀고도 험했지만, 건기에 해당하는 현지의 저녁 날씨는 제법 괜찮았습니다. 한국에서 사용하던 휴대폰에 현지 통신사 유심칩을 끼워보니 인터넷도 무척 빨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휴대폰 앱으로 이용 가능한 콜택시와 음식 배달 대행까지 각종 생활 편의 서비스가 무척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고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 사는 곳이 다들 비슷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 정도면 구강
지귀(志鬼) 이야기를 아시나요? 저는 경주하면 지귀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적어도 저에게 경주는 불국사도 석굴암도 아닌 지귀의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지귀는 선덕여왕을 한 번 본 뒤 반해 버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선덕여왕을 부르다가, 그만 미쳐 버리고 만 친구입니다. 어느날은 지귀가 영묘사의 탑 아래 선덕여왕을 기다리다가 지쳐 잠이 들게 됩니다. 지나다 그 모습을 본 선덕여왕은 그런 지귀가 가련해 팔목에 감았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 위에 놓은 다음 발길을 옮기었습니다. 여왕이 지나간 뒤에 비로소 잠이 깬 지귀는 가슴 위에 놓인 여왕의 금팔찌를 보고는 너무 좋아 껴안고 어찌할 줄을 몰라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모의 마음이 너무 커져 불씨가 되어 가슴 속을 활활 태우더니, 어느새 온몸이 불덩이가 되고, 결국에는 불귀신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지귀가 세상을 떠돌아 다니자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다른 백성들이 다치지 않게 주문을 짓게 됩니다. ‘지귀가 마음에 불이 나(志鬼心中火) 몸을 태워 화귀가 되었네.(燒身變火神) 마땅히 창해 밖에 내쫓아(流移滄海外) 다시는 돌보지 않겠노라.(不見
김동석 원장 ·치의학박사 ·춘천예치과 대표원장 <세상을 읽어주는 의사의 책갈피>, <이짱>, <어린이 이짱>, <치과영어 A to Z>, <치과를 읽다>, <성공병원의 비밀노트> 저자 도끼를 잡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 때 산골의 민박집에서 땔감을 자르는 걸 보고 따라 했던 기억입니다. 그것 말고는 살면서 도끼를 잡아볼 일이 있을 턱이 없지요. 나무를 베는 평범한 도구인 도끼가 가지는 이미지는 사실 폭력적이고 파괴적입니다. 학생 때 친구를 포함해서 살면서 주변에 ‘도끼’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을 여럿 만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도끼는 뭔가를 파괴하는 의미의 언어가 되었습니다. 『변신』 『소송』 『성』 『시골 의사』 등으로 유명한 카프카는 20세기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실존주의 작가로 평가됩니다. 제가 카프카의 책을 읽은 이유는 우연히 알게 된 카프카의 글 때문이었습니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에 이런 말이 쓰여 있습니다. ‘나는 우리를 깨물고 찌르는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해.’ 이 문장으로 인해 그저 카프카를 좋아하게
‘설’이라는 이름을 찾기까지는 꽤 여러 번의 곡절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한민족의 정신을 훼손하기 위해 음력 설날이 폐지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상당 기간을 1월 1일을 설로 정했습니다. 이중과세 방지정책을 유지하기 위함이란 명목으로 ‘민속의 날’로 불리기도 했으며, 양력 1월 1일은 ‘신정’, 음력 1월 1일은 ‘구정’이라 폄하되었습니다. 설의 어원을 찾아보면, 1년이면 한 살, 2년이면 두 살 등 나이를 헤아리는 ‘살’이 ‘설’로 바뀌었다는 것과 ‘설다’, ‘낯설다’와 같이 새로운 것을 표현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설은 그 이름이야 어떻건 간에 한 해의 시작 첫날에 모두 모여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차례를 지내고, 가족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이 서로에게 세배하고, 흰 떡국과 여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복과 건강을 기원하는 덕담을 주고받고, 행복을 기원하는 날입니다. 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확대보기 가능합니다. 지금은 ‘설’이 민족의 명절로 제자리를 찾았습니다만, “새해”의 기준은 여전히 1월 1일과 ‘설’ 둘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 기준이나 낭비적 요인 어쩌고 하는 말들과는 상관없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덕
이승만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의 ‘폭풍작전’으로부터 대한민국을 구해낸 신의 한 수다. 공산 독재냐 자유 민주냐 개념조차 생소한 국민에게, 최소한 꼭 지켜야 할 ‘내 것’을 쥐여 준 것이다. 일찍이 레닌은, “농민은 땅에 대한 집착으로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 적당히 이용하고 버려라”하지 않았던가? 충청도는 다른 곡창지대와 달리 지주·소작농관계보다 자작농이 더 많았다. 소작농은 당장 눈앞의 마름 눈에 들어야지, 뼈 빠지게 일하는 건 한양에 계신 지주의 배나 불리는 일이다. 흉년이 들면 지주는 곳간을 풀어 소작농의 생계를 도와준다. 일종의 농기구(農器具) 관리다. 직업이라는 개념에서 ‘도덕적 해이’가 기생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자작농은 다르다. 쌀 한 톨 한 톨이 내 재산이니 피땀을 쏟는다.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지낸다. “검은 구름이 몰리는 걸 보닝께 오늘 니얄 한 줄금 허것는 디?” “예끼, 이 사람아. 어느 구름에 비 들었는지 누가 안 디야?” 6·25 전쟁 중에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린 명장은 임부택 소장이다(1919-2001). 장군의 7연대는 개전 첫날부터 춘천·홍천 지구에서 북괴군 2개 사단을 괴멸시키며 유일하게 3일을 버텨, 국군은 전열
물건 가격이 9900원으로 끝나는 광고를 우리는 자주 접하게 된다. 마트나 창고형 할인매장에서 프로모션이라는 미명 하에 덤핑처리를 하기 위해 자주 이용되는 방법이다. 쏟아 붓는다는 뜻의 Dump(ing)이란 다른 물건보다 일부러 싸게 팔아 시장을 점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매력적인 가격에 현혹되어 물건을 구매하게 되고 기업은 이윤 창출과 더불어 인지도 상승에 따른 시장 점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된다. 반면 경쟁에서 밀린 동종업계는 자구책을 찾아 나서려고 상품의 질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좇는데 급급할 것이다. 더 높은 수익을 단기간에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장기적인 비전에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하지만 그들은 선택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포털사이트에 경쟁하듯 깜박거리는 *9만원 임플란트 광고를 볼 때면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이 광고를 보고 온 환자들에게 *9만원이 안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가격 흥정을 하고 있자면 치과의사로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실상 임플란트 한 개를 심는 데 재료비는 20%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치과의사가 폭리를 취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