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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학

스펙트럼

나는 실로 오랜만에 문화 산책을 위해 아내와 길을 나섰다. 문화 산책의 테마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다.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도 꽤나 열심히 했던 나로서는 이런 분위기가 ‘오랜만’이라는 게 살짝 부끄러웠다. 하긴 지금까지의 나의 삶속에선 느림을 찾아볼 수가 없었기에 더욱 그렇다. 늘 바쁘게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빠름에 길들여진 습관으로는 도저히 느림을 표현하기는 어렵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하고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느림의 미학으로 삶을 산책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아내는 뮤지컬과 연극을 보는데 적잖은 돈을 쓰고 있다. 그런데 인간의 오감인 시각, 미각, 청각, 후각, 감정의 표출과 공감을 통한 문화의 경험적 소비는 사리지고 없어지는 다른 어떤 소비와는 다르게 다시 삶의 충전을 통해  에너지를  재생산하는  원동력이 있는 듯하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배경은 스페인의 어느 지하 감옥이다. 신성 모독죄로 감옥에 끌려온 세르반테스는 죄수들과 함께 감옥 안에서 즉흥극을 벌인다. 라만차에 살고 있는 알론조는 기사 이야기를 너무 많이 읽은 탓에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기사라고 착각하고 시종인 산초와 모험을 찾아 떠난다. 늙은 기사, 돈키호테의 끝나지 않은 꿈의 도전, 무모하리만큼 고지식하고 황당한 모험을 통해 웃음과 감동을 전해준다.

또한, 맨 오브 라만차의 무대는 시공간의 한정된 공간에서만 그 모든 것을 표현해야 되는 연극의 단점을 조명과 영상으로 한계성을 극복했고 무대 또한 표현주의적 무대미술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위에서 펼쳐진 모든 배우들의 연기, 춤, 노래 또한 훌륭했지만, 특히 조승우가 표현한 돈키호테의 노인 역은 과연 배우라는 생각을 하기에 충분했다. 대학시절 난 몰리예르 작 ‘강제결혼’이란 연극에서 수전노 ‘스가나렐’이란 노역을 공연해 봤기에 젊은 사람이 노역을 맡게 되면 흉내 내기에만 급급하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조승우는 달랐다. 노래마저도 노역의 목소리로 소화해 냈기 때문에 더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2시간 50분 공연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고 지루하지가 않았다.

공연 중 돈키호테가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 오직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뿐… 이것이 기사의 의무이고 철학이다”라고 던진 대사가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길을 막고선 꾸부러진 칼을 꺼내들고 나를  향해 외치는 것만 같았다. 살면서 얼마나 지지 않으려고만 살아 왔던가! 그리고 주어진 나의 길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말이다. 정작 중요한 일에 바쁜 게 아니고 급한 것들과 의미 없는 시간들을 허비하느라 바쁜 삶을 사는 척 많이 했던 것 같다. 누군가 얘기 했었다. ‘젊을 땐 시간이 걷는 속도로 가지만 나이가 들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것이라고….’

이제 바쁘게 살지 않아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빠르게 움직일 터이니 난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고 산책하면서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어 주어야겠다. 그리고 더불어 자주 이런 삶의 여유를 느끼고 ‘느림’을 내 것으로 가꾸어야겠다.
‘그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가?’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조갑주 안양 웰빙미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