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하에서 여성들은 온 몸을 뒤덮는 부르카를 입게했다. 지금도 중동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길에서 베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린 여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여인들이 얼굴을 검은 천이나 흰 것으로 가리고 다니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슬람 여자가 결혼했거나 신체적으로 성숙하면 부모가 얼굴을 비롯한 신체를 가리게 한다. 이슬람 종교에서 본래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성적 존재로 인정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곡해됐다. 여성은 성욕이 강하고 조절능력이 떨어진 것으로 인식됐고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남성을 성적으로 탈선하도록 유혹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일부 보수적 이슬람 시각에서 여성은 유혹적인 존재이며 사회 혼란의 원인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이슬람 국가에서 여인들은 성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머리를 베일로 가려야 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여인들은 물론 지금 중동지방의 습관처럼 항상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쓰고 다니지는 않았다. 구약에서도 얼굴에 너울을 쓰는 것은 여인이 미혼인 것을 통상 나타내는 정숙한 행위였다.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정숙한 여인들은 공통적으로 대중 앞에서 베일을 사용했다. 여인의 베일을 걷게 한 것은 그녀에게 창피를 주기 위한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자기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 놓고서. 우리를 잡아 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했지만, 우리를 끌어 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고 했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내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시편 137,1-6참조) 바빌론으로 유배를 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철한 삶이 배어있는 시편 귀절이다.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 시편을 읊으며 자신의 비참한 역사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역사를 떠올리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남북이 분리된후 남쪽 유다 왕국은 북왕국 멸망 (B.C. 722년경)후에도 존속해 나갔다. 남쪽 왕국은 수도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한 정치적 종교적 중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초대 왕으로 해서 20명의 왕이 계승해 남쪽 유다 왕국을 지배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은 신 바빌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최근에 이스라엘이 레바논 지역을 공격하는 장면이 연일 언론에 등장하고 있다. 민간인 사상자도 많이 발생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와 전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독 이방인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대목이 성경에도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남쪽 유대에서 북쪽 갈릴래아로 갈 때 이방인의 땅,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두배나 되는 먼 길을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들의 접촉은 금기시 됐다. 그래서 성서에 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가시다 더위에 지친 피곤한 몸을 쉬기위해 우물가를 찾으셨다.(요한 4장 참조) 그때 예수님은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넸다. 보통으로는 이방인과 말하는 것이 금지됐던 당시의 관습으로 보면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여인은 “당신은 유다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 적대적으로 상대 했을까?지금의 이스라엘 전체
잠언서에서는 “어리석은 자는 제가 한 말로 등에 매를 맞고, 슬기로운 사람은 제가 한 말로 몸을 지킨다."(잠언 14, 3)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것이리라. 반대로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말 한마디에 곤경에 빠지고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내가 아는 고등학교 선생님은 동료와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는다. 사람들은 그 선생님이 다른 이를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분과 이야기 나누면 늘 편안하고 기분이 좋아진다고 한다. “저는 말을 할 때 항상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을 하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특히 가능하면 남의 험담이나 나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대화를 할 때도 늘 이런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선생님의 말은 감동적이었다.교만한 사람은 말을 통해서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지만 지혜로
성서에 보면 예언자들이 “야훼냐? 바알이냐?” 하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구약성서에 자주 언급되는 바알(Baal)신은 어떤 신인가? 바알 신은 본래 풍년신으로서 가나안과 페니키아에서 많이 숭배했던 우상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특히 바알이 비를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을 때 이들은 바알을 섬겼다. 바알은 ‘주인"혹은 ‘소유자"란 뜻을 가진 토지의 주인이며 풍요를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바알을 섬기는 방법은 특이했다. 낮에는 바알신을 섬기는 성녀들이 밤에는 창녀로 변하여 신전에서 참배자들과 음행을 하면 바알신이 성적으로 흥분하여 그의 아내와 성관계를 가질 때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늘, 땅 폭풍 등의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존재들을 신으로 믿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왕국이 형성된 때까지의 약 200년간을 판관시대라고 부른다. 이 판관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유목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정착하고 자유로운 연합체에서 하나의 통일왕국의 체제로 넘어가는 갖가지 변화를 겪어야만 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위에 있는 가나안 여러 종족들과의 싸움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그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시어 처음부터 주일을 지키라 명하셨고, 안식년(安息年)과 희년(禧年)까지 마련하여 땅과 가축들과 노예들도 쉬게 하라고 하셨다(레위기 25,1-7). 예수님도 전교를 하고 돌아온 사도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31)고 말씀하셨다. Recreation은 Re(다시)와 creation(창조)가 합해진 말이다. 따라서 휴식도 하느님의 창조질서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창세 2:2-3). 노동과 휴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천지창조를 통하여 분명하게 가르쳐 주신 계명이다. 사람은 육체를 통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일이나 육체적인 일이나 오래도록 계속할 수는 없다. 건강을 유지하고 더 능률적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마다 피곤을 푸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휴식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날 사회는 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전문화한 일을 요구하고 있으며 언제나 긴장된 상
작년에 신문에서 성탄절날 강원랜드에서 수억원의 빚을 지고 투신 자살한 사람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강원랜드 개장 이후 일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등 도박으로 자살 한 사람은 모두 17명에 달한다고 한다. 몇년 전에 개장한 내국인 카지노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몰린다고 한다. 한 해 동안 검거된 도박사범만도 무려 3만4천명이나 된다. 도박피해를 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수인지 짐작만 할 뿐이다. 또한 최근에는 도박장들이 주택가 깊숙이까지 진출하여 큰 사회 문제가 된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최근 많이 생겨나고 있는 불법 카지노바에 따른 피해는 더욱 크다고 한다. 지난해 서울에서만 문을 연 성인오락실만 537곳이 넘는다고 하니 도박산업은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도박문화의 폐해는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사실 도박으로 인한 폐해는 이미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도박으로 자기 자신은 물론 가정이 파괴되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 그런데도 불법적이고 그리고 합법적인 도박장에서도 도박중독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점점 사행성을 부추기고 있지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게 된다. 누구나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인도의 시성 타골은 “한 사람의 영혼은 전 우주와도 바꿀 수 없이 존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물이 ‘보시기 좋았다’라고 긍정하신다.(창세기 1장) 특히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평가한다. ‘참’이라는 부사를 통하여 다른 창조물보다 인간 창조가 하느님에게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주보다 소중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다른 생명은 물론 인간이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심각해지는 환경파괴는 이미 한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사람의 목숨만 위협을 받는 것이 아니다. 공기와 물, 땅은 오염되어 생태계는 파괴되고 많은 생물들은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환경에서 개인들은 생명의 근원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다. 환경 파괴의 원인을 보통으로 산업 문명, 기계 문명에서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인간도 피조물임을 망각한데서 근원이 있단 점을 기억
현대인은 외적으로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내적으로는 과거보다 훨씬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이후는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극단적으로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늘어만 가는 교통사고, 산업재해, 점점 심각해지는 환경파괴는 특정 지역에 사는 이들만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더구나 죄도 없는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테러와 전쟁이 소위 문명사회라는 현대에도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잔혹한 모습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 가까이는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는 중금속, 농약 잔류물, 방부제 등 온갖 형태의 유해 물질들이 가득 들어 있어 우리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얼마전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고생을 했다. 사회문제가 된 낙태 문제는 철없는 미혼모들의 전유물이 아님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현대는 사람의 목숨만 위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한정된 자원을 점점 대규모로 약탈해 고갈시키고 공기와 물, 땅을 오염시켜 생태계는 파괴되고 생물들은 멸종 위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환경에서 개인들은 자신 속의 무궁한
오늘날도 유다인 남자들은 “하느님! 나를 이방인이나 여자로 만드시지 않았기에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기도를 드린다. 유다인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구약시대에서는 여자는 주로 성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여인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되었으며 철저히 아버지나 남편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부인들은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남편을 주인처럼 섬겼다. 부인은 자기의 남편을 부를 때에 마치 노예가 자기의 주인을 호칭하거나 신하가 자기의 왕을 호칭하듯이 하였다. 그리고 여인들은 종교적인 면에서도 남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자유조차 없었다. 딸들은 율법을 배울 수 없었고 율법 교사가 될 수도 없었다. 십계명은 집, 밭, 종, 소, 나귀와 마찬가지로 부인도 남편의 소유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다.(탈출 20, 17) 또한 부인은 재산의 상속권도 가질 수도 없었다. 다만 남자의 후손이 전혀 없을 경우에만 예외가 되었다(민수 27, 8). 이스라엘 여인의 위치가 여자 노예와 법률적으로 다른 점은 혼인 때의 지참금에 대한 소유권과 남편과 이혼이나 사별 시 그녀에게 지불될 금액이 기록된 혼인 증서를 담보로 가지고 있
로마의 여행객들이 빠지지 않고 찾는 장소중에 하나가 바로 카타콤바이다. 카타콤바는 초기 그리스도 교인들의 지하묘지로 알려져있다. 나폴리·시라쿠사·몰타·아프리카·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바는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한다.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되고부터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바라 부르게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카타콤바라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여진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당시 로마의 가난했던 사람들은 그들 가족을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동굴도 거의 다 무덤으로 차 버리자, 그때부터 땅을 파고 지하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1세기 중엽부터였다고 한다. 로마의 이교도들은 자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