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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조선 최초 여성치의 독립운동가 최금봉 여사 아시나요

총독부 발행 면허번호 295번…평생을 진료와 여성운동 헌신
건국훈장 애국장수상, 공훈인정 여성독립유공자 270명 중 1인
일제 폭압항거했던 치열한 삶…후배들에 자부심 심어주기 충분


치과계 역사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한민국 독립·여성·사회운동사에서는 존경 받는 인물이 있다. 조선 최초의 여성 치과의사이자 항일독립운동가 ‘최금봉(호 梅智·매지)’ 여사. 일본의 무역규제로 온 나라에 ‘NO 재팬’ 운동이 한창인 요즈음, 앞서 일제 폭압에 항거했던 선배 여성 치과의사의 삶에서 오늘을 사는 치과의사들이 느끼고, 또 자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커 보인다. 최근 그와 관련해 발간된 논문, 관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조선 최초 여성 치과의사의 삶을 살펴봤다.
 

한국여성사학회 학회지 ‘여성과 역사’ 최근호에 실린 ‘최매지의 민족운동과 사회활동(저 윤은순)’ 논문에서는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사회운동가인 최금봉 여사의 일생을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다.

1896년 5월 6일 인천에서 출생한 최 여사는 사업을 하는 부친과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가풍으로 개화된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천 영화여학교와 평안남도 진남포 삼숭여학교에서 공부하고, 1914년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최금봉 여사는 일본 유학 후 다시 진남포로 돌아와 삼숭보통학교 교사에 부임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발을 들인다.

이미 삼숭여학교 재학시절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던 최 여사는 교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3·1운동 이후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에 참여해 서기 겸 진남포 지회장으로 활동했으며, 당시 최금봉 여사의 주요 임무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20년 진남포 신흥리교회에서 일제에 체포돼 2년 징역형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 후 1922년 출옥한다.

이 시기 최금봉 여사의 머릿속에 전문지식을 갖추고 이를 바탕으로 한 여성·사회운동에 대한 계획이 싹텄으며, 그것은 바로 치과의사가 되는 길이었다.

최금봉 여사는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치의학을 공부, 1928년 동경여자치과의학전문대학 본과를 졸업하고, 1929년 전공과마저 마친 후 귀국해 진남포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1931년 3월 2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치과의사면허를 취득한다. 면허번호는 295번, 이 내용은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려 있다. 이후 해방 후에는 다시 새로운 면호번호 311번을 부여 받았다. 이는 치협 회원명부 자료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최 여사는 진남포에서 남포치과의원을 개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대상으로 무료 치과진료를 마다하지 않았고, 의료진이 부족한 시절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주변 지역을 돌며 외과와 소아과 의사의 역할까지 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최 여사는 1938년 42세 다소 늦은 나이에 결혼, 남편을 따라 안동으로 이주해 읍내에 삼일치과병원을 개원해 활동했으며, 진료와 함께 지역사회 아동·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에 열을 올렸다. 이후 남편이 1945년 일찍이 사망하며, 이때 “내 일신과 내 가정을 생각하기보다 나라를 위해서만 몸을 바치라는 하늘의 명령”이라는 결심을 하고 평생을 나라와 국민에게 헌신하는 삶을 걷는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안동애국부인동지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으며,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 선거에서 안동의원에 당선돼 정치활동에 나서는 등 당시 여성 사회운동가로서 쉽지 않은 업적을 쌓았다. 이후 6·25 한국전쟁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 개원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도 전쟁으로 다치고 굶주린 이웃들에게 무료 진료봉사와 지원활동을 끊임없이 이어 갔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월계동에 삼일치과를 개원했는데, 이 시기에도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아동과 여성, 특히 윤락여성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최금봉 여사가 치과의사로서 지부 회무 참여에도 적극적이었다는 것. 1956년 서울시치과의사회 제9대 임원명단에서 총무를 맡았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그의 업적에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 최 여사는 여성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용신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6년 정부 통계에 의하면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는 1만4262명, 이 중 여성 독립운동가는 270명. 최금봉 여사는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은 270명 여성 독립투사 중 한명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다.

최금봉 여사는 1967년 치과를 접고 은퇴했으며, 후손이 없어 조카와 함께 서대문구 갈현동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3년 향년 87세 나이로 별세했다.

말년 최금봉 여사는 “남을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허덕이다 그만둔 것 같아 부끄럽다. 특히, 여성이 남을 위해 봉사하는 데는 더 큰 인내력을 가지고 생활해 가야 한다. 중도에 그치는 일은 봉사라고 할 수 없다. 걸음을 걸을 수 있는 한 밖에 나가 남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