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 계속함석태 선생님은 일제강점기 중요 수장가의 한사람으로 꼽힐 만큼 좋은 고미술품을 많이 소장했던 사람이다. 고미술품에 대한 수장벽이 취미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수집해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이 여겨 민족 유산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으리라.함석태 선생님은 서화 골동품 외에도 분재, 꽃꽂이 특히 煎茶(전다)를 좋아해서 이런 류의 취미가 고미술품 수장 활동에 중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1930년초 고미술품 수장가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장택상을 중심으로 당대 최고의 수집가들 모임에 참석했던 것은 함 선생님의 고미술품에 대한 열정과 감식안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장택상의 집에서 이루어진 모임은 한국 근대 고미술품 소장과 유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함석태 선생님은 ‘小物眞品大王’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많은 고미술품을 소장한 일제 강점기 굴지의 고미술품 소장가 가운데 한분이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9월 또는 10월경 함석태 선생님은 일제의 소개령에 따라 자신의 소장품을 모두 세대의 차에 싣고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가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황해도 해주를 거쳐 월남하려다 실패한 함석태 선생님의 이후 소식은
지난호에 이어 계속최초의 치과의사 咸錫泰는 1889년 평안북도 영변군 오리면 세죽동에서 부유한 집안의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은 咸泳澤으로 成均館 進士와 醫官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미루어보아 그 지방의 鄕班 계층이었음이 분명하다.함석태는 외아들 哲薰과 두딸 순정과 문을 두었고 양녀로 姜英材가 있었다. 함석태의 손자로는 완(玩), 순(珣) 어렸을때 죽은 珍과 玉 그리고 막내 각(珏)이 있었다. 그의 다섯 손자이름은 함석태가 지었으며 각자마다 ‘玉’변이 들어가 있다. 玩은 1965년 사망했고 珣은 경관으로 근무하다 6·25때 실종되었다. 아들 哲薰은 부부가 6·25때 폭격으로 사망했다. 실로 불행한 가족사였다. 珏은 살아남아 1985년 치과임상(신종호)과 인터뷰에서 증언하고 있다. “대단한 부호였음에 틀림없다. 소작을 주는 전토도 많아서 고향에서는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증조부 함진사(咸泳澤)는 재산도 많은 만큼 학교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는 등 소위 사회사업도 많이 하셨다고 들었다. 조부(咸錫泰)가 일본유학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咸錫泰 선생님이 당시로 생소한 분야의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없었던 시
우리나라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최초의 개원의는 함석태(咸錫泰)이다. 1914년 6월 19일 서울 삼각정 1번지 옛 濟蒼局(제창국)자리 동쪽에 3층 목조건물을 신축 개업하였다. 금년이 개원 100주년 되는 해이다. 그때 나이 25세였다. 당시 그 위치에 그 규모의 개원이라면 부모님의 경제적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리라.치과의사로서의 함석태(咸錫泰). 고미술 수장가로서의 함석태, 애국자로서의 함석태 등 3회에 걸쳐 선생님을 회고하고자 한다.초겨울 바람이 쌀쌀한 11월 15일 토요일 오후 선생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개원 위치를 먼저 확인하기 위해 답사의 길을 나섰다. 답사 순서는 먼저 최초의 개원자리 현재 위치 확인과 함석태 선생님과의 사연이 얽힌 종각, 서울역 광장의 강우규 의사 동상 순으로 탐방키로 했다.치협 박영섭 부회장, 이병태 치과의사학회장, 김평일 서치 협회사편찬위원장, 이재윤 서치 공보이사, 치의신보 안정미 기자, 치과신문 편집장 최학주, 치협직원 권남학 씨 등이 함께 했고 탐방을 위해 몇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안산, 인왕산이 보이고 제창국(濟蒼局) 간판과 그 아래 ‘치과’라고 선명하게 나온 청계천 다리와 함께 찍힌 1930년대 사진 한 장사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