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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이야기

Relay Essay 제2123, 24번째

“잠시 조사 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한참 기운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 경찰차가 집 앞에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남녀 경찰 두 명이 성큼 앞정원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갓 스무 살이 넘었을까 말까한 아주 앳된 소녀티가 물씬 풍기고, 남자는 40대의 몸집이 거대하고 씩씩한 생김새의 경찰이다. 푸르름이 절정을 이룬 초여름 잔디밭 위에 잘 다려 입은 카키색 제복과 붉게 물든 석양빛에 번뜩이는 은색 계급장이 사뭇 위압감을 풍겨 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주민의 요청도 없이 경찰이 출동하였다는 것은 처음 당해 보는 일이라 말소리에 바짝 긴장이 느껴진다. 이곳 영국에서는 고사하고 한국에서도 접해 보지 못하던 일이다. 

더욱이 내가 살던 런던 근교 ‘스테인스’라는 동네는 템즈강 상류 쪽에 위치한 조용하기 그지  없는 마을이라 일년 내내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이다. 거실에서 바라보이는 강위에는 하루 종일 형형색색의 보트들이 유람을 하고 군데군데 젊은 청춘들이 카약위의 노를 젓는 곳. 그 사이사이를 몸집이 꽤 큰 백조들과 새끼들이 함께 떼를 지어 어디론가 유유히 헤엄쳐 가기도하는 그런 평화스런 곳이다.

집 앞쪽으로는 커다란 잔디밭이 딸린 앞 정원이 있고 도로와 붙어 있으나 대문과 담장은 없어 아무라도 들락거릴 수 있다. 뒷쪽으로는 템즈강과 사이에 작은 오솔길을 두고 맞닿아있는데 동네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산책을 하러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오솔길과 접한 뒷정원 잔디밭에는 야트막한 나무 담장만이 둘러져 있어 지나다니는 행인들은 집 전체를 다 조망할 수 있다. 산책하는 사람들은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우리 식구들에게 말을 걸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우리보다 우리집 강아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우리는 ‘#$%’(사실로 말하자면 못 알아들었음)에서 나왔는데요, ‘토니’를 키우고 계시지요? 그녀가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들은 의아하게도 우리 토니 이름을 댄다. 더구나 암놈이란 것 까지를 이미 알고 온 모양이다. 하지만 토니를 들먹이는 것으로 보아 별다른 큰 사건은 아닌 것 같아 일단 안심이 된다. 날이 바짝 선 제복을 입고 있긴 해도 총을 휴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경찰도 아닌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놓인다. 나는 그들을 ‘토니(영국 전 수상 토니 블레어를 따서 지은 우리집 개 이름)’의 놀이터로 데려 간다. 집의 앞마당과 뒷마당 사이에 판자문으로 막은 한두 평 정도 되는 숨은 공간인데 내가 외출 시에 토니를 잠시 넣어 두고 다니는 곳이다.

“신상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누군가 신고를 해서 우리가 출동을 했습니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개를 가두어 두고 외출하면 안 됩니다. 물론 마실 물도 충분히 주어야하고요.”

그들은 토니가 있던 곳을 살펴 본 후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던지 개 사육에 관한 조그마한 책자를 주고는 이내 가버렸다. 나중에 알고보니 RSPCA(왕립 동물 학대 방지협회·The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 소속의 직원들로 동물에 관해서는 경찰과 같은 막강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기관의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우리 집을 눈여겨 보고 있다가 협소한 놀이터에 갇혀있는 토니가 안쓰러워 신고를 한 모양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이다. 하루는 런던을 다녀와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못 보던 물그릇과 함께 생수가 한 병 놓여져 있다. 토니를 바깥 좁은 곳에 가둬두면 안된다고 하기에 이번에는 목줄을 길게 하여 집안 거실에 묶어 놓고 볼일을 보러 다녀왔던 터이다. 토니가 밖으로 나오고 싶어 하루 종일 현관문을 두드리며 낑낑 대니까 누군가 물과 함께 물그릇을 밑에 달려 있는 개구멍-개나 고양이가 다니는 쪽문-을 통해 밀어 넣고 간 것이다. 나가기 전에 물과 먹이를 충분히 놓아두었는데도 불구하고. 짐작컨대 ‘어떤 코리안이 이사와서 개 한 마리 말려 죽이려나보다’라고 생각한 이웃이 한 짓 일게다.

개들도 사람처럼 자주 외출을 시켜주고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게 해주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나는 나의 건강을 위한 산책에 토니를 데려 가지만 영국인들은 개의 건강을 위해 자기들이 따라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의 애완견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집에서 한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 동네의 다운타운이 있다. 그 곳에 상점들이 몰려있어 가끔 장을 보러 가는데 사야 할 물건이 많지 않으면 산책 삼아 토니를 데리고 걸어 갈 경우가 있다. 언젠가는 쇼핑몰로 둘러싸여 있는 광장의 벤치에서 토니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몇몇 할머니들이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를 해온다. 토니에게.

그들의 애완견 사랑은 알아 줄만하다. 계단을 오르기 귀찮아하는 개들을 위해 개 전용 에스컬레이터가 개발되고 개들의 디지털 TV시청을 위한 콘텐츠 개발을 서두르는가 하면 공원에는 개 전용 아이스크림차가 등장하기도 한다.

우스갯소리만이 아니고 대접받는 순서가 첫째 어린아이, 둘째 노인, 셋째 여자, 그 다음이 개, 맨 마지막에 남자가 들어간단다.

토니는 레브라도종이다. 짧고 조밀한 털과 근육질의 균형 잡힌 몸매를 갖춘 귀여운 놈이다. 넓은 앞가슴, 작고 단단한 발에 꼬리는 뿌리가 굵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아래쪽에 털이 무성한 멋진 녀석이다. 하지만 외화내빈이라고 잘생긴 반면에 머리가 나뻐서인지 아니면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지 강아지 때부터 기억력은 형편없다. 어디 나갈 때는 항상 목에 줄을 매달고 끌고 다녀야만 한다. 조금만 멀리 나가도 길을 잃고 혼자서는 집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번은 이삼일 동안 돌아오질 않아 포기하고 있던 중에 전화가 왔다. 런던 교외에 있는 어떤 동물 구호 시설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토니를 이삼일 먹여주고 재워 준 대가로 호텔비와 맞먹는 돈을 지불하고서야 데려 올수 있었다. 물론 강아지 때 목에 식별 칩을 넣어 두었기에 이도 가능했지만…….

토니가 집을 나가 헤맬 때마다 동네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 얼마나 우리 개에 대한 소문이 돌았는지 이사 온지 며칠 되지 않아 잃어 버렸는데도 토니가 어디로 갔는지 어디에 있을지 이웃 사람이 알려 주는 것이다. 아마 우리 가족에 대해서 보다 토니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 싶다. 산책길을 지나가던 사람들과 이웃들은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찌보면 토니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 막내 아들과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토니를 데리고 산책한 적이 있다. 아이가 13살 때 일이다. 옥스포드 서커스 근처의 포틀랜드 스트리트라는 거리로 럭셔리한 영국식 개인 병원이 밀집돼 있는 아주 깔끔하고 한적한 곳이다. 나는 먼저 신호등을 건너 반대편 보도를 걷고 있었고 막내는 토니를 끌고 뒤쳐져 오는 중이었다. 무언가 낌새가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애가 멈춰 서서 더 이상 걸어오지 않고 토니를 끌어안은 채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급히 되돌아 달려가 보니 이미 아이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물어보자 어떤 아줌마가 자기에게 한마디 하고 사라졌단다. 이야기를 들고나니 나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 따지려고 둘러보지만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나도 무척 속상했는데 어린 아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걱정이 앞섰다.

영국의 백인 여자들은 남자들과 달리 정말이지 황당한 사람들이 꽤 있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얘, 너 이 개 언제 잡아 먹을거니?”  

박정용 그린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