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덩이를 묻어 놓은 것도 아니고 제발 가라고 등을 떠미는 이 하나 없지만 나는 쉬는 날엔 어김없이 등산화를 신는다. 등산이란 취미는 나에게 있어서 ‘독고다이’다. 물론 국어사전 그대로 풀어보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필자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에서의 ‘독고다이’다. 다른 취미생활과는 다르게 등산은 철저하게 ‘독고다이’ 그 자체다. "회비 얼마씩 걷을까?" "언제 갈래?" "사람들 많이 온대?" "몇 대 몇으로 할까?" 등등 다른 취미생활에서는 사람들 간에 매번 오갈법한 피곤한 질문들과 아쉬운 소리들은 등산에서 만큼은 예외다. 왜냐면, 나 혼자 등산화를 신고 날아가면 되니깐. 시간, 약속, 계절 등등. 다른 취미생활에서는 신경써야 하는 부분들은 혼자 등산화를 신고 나선다면 ‘아웃 오브 안중’이다. 혼자 씩씩하게 산을 탈 때 나는 땀방울은 상쾌하기 그지없고 산에서 들이마시는 공기와 물은 꿀맛 그 자체다. 산속 곳곳에 숨겨져 있는 유적지와 각종 설화들과 사찰들은 알면 알수록 새롭고 등산 중간 중간 보이는 명소들과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은 매번 새롭기 그지없다. 아침에 시작되는 출근길 지옥철 부터, 회사생활, 사회생활에서 겪는 스트레스는 오늘
치과 문인회 회원 10명과 함께 대마도(쓰시마)문학 기행을 다녀왔다. 말이 문학 기행이지 실제 역사 기행이었다. 볼거리 많은 유명 관광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와 관계있는 유서 깊은 곳을 찾아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싶어 언젠가는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여행은 떠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설렘이다. 자유업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도 있겠지만 시간에 얽매여 어찌 쉽게 그리되던가. 현충일 끼고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었다. 현충일이라 6·25 당시 학도병으로 전사하신 큰 형님을 생각하면 개운치 않은 마음이었다. 서울역 출발 새벽 5시, KTX 부산행 열차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둘렀다. 새벽 시간이 부담스럽긴 했으나 다행히 큰 딸의 배려로 서울역에 편히 도착했다. 딸의 배웅에 따뜻함을 느끼며 기차에 올랐다. 부산항 여객 터미널에서 대마도행 오션플라워 호에 승선해 2시간 10분 후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도착했다. 이즈하라항은 남쪽에 있고 북쪽에 히타카츠항이 또 있다는 사실도 대마도에서 알게 되었다. 대마도에 관한 사전 지식이라곤 노략질하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세종대왕 시절 이종무가 대마도 정벌을 했다는 것, 조선 통신
음빠 음빠 음빠빠 ~ 어여뻐라 그처녀. 스페인 바로셀로나 인근 깔레아에서 고향의 봄이 아카펠라로 울려퍼졌다. 어렵사리 섭외한 끝에 호텔식당 한쪽에서 연습을 마쳤는데 단원 몇분이 눈가를 손으로 닦는 것이었다. 알 수 없이 밀려오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노라 했다. 그랬을 것이다. 1년여 전에 깔레아에서의 코스타 바르셀로나 참석을 결정한 후로 그 흥분도 잠시, 한국을 표현할 수 있는 곡을 선정하고 출발 할 때까지 긴 여정 동안의 노력과 무대에 설 긴장감이 더 해졌을 것이다. 단원 20여명과 지휘자, 반주자, 합주를 하는 명창, 단원들의 가족과 게스트 원장님들이 함께 한 합창제 여행을 시작했다. 토요일 늦은 밤에 출발해서 거의 20 여 시간만에 마드리드에 도착했을때의 첫 느낌은 맑은 공기를 한국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스페인의 옛 수도인 톨레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멋진 식당에 도착해서 첫 점심을 하며 스페인스러움을 만끽했다. 톨레도 대성당 가는 길 양옆의 건물위로 긴 천을 걸어 길을 안내하는 친절함과 그것 마저도 예술 작품으로 만든 그들의 감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음날엔 아베(스페인 고속열차)를 타고 세비야로 이동했다. 버스로 7시간 30분 거
<2621호에 이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Bainbridge Dental Museum에서도 낙담, 간절과 환희가 있었다. 아침 일찍 클리브랜드 클리닉(Cleveland)을 살짝 구경한 후, 클리브랜드에서 3시간 30분 동안 차로 달려와서 박물관 폐관 1시간 전인 3시쯤에 도착하였다. 분명 치과박물관은 토, 일요일에는 오후 4시까지인데 박물관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내 속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는 없다. 아직 1시간이나 남아있으니까. 4년 전에 방문했을 때 박물관에서 자원봉사하신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났고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비를 맞으며 치과 박물관의 옆집과 동네 슈퍼에서 박물관 담당자 연락처를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허사였다. 마침 세월의 포스가 느껴지는 레스토랑이 눈에 띄어 무작정 들어가서 주인처럼 보이는 할머니에게 문의하였다. 한국에서 치과 박물관을 구경하러 왔다하니 주변 지인들에게 전화로 물어보겠다고 하였다. 20여분이 흐르니 담당자와 연락이 되었고 15분후에 치과 박물관 문을 열어준다고 하였다. 할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수없이 표시하였고 인증샷도 찍었다. Angje와 Connie 고맙습니다. 건강
<2619호에 이어> 천신만고 끝에 방문한 볼티모어의 Dr. Samuel Harris National Museum of Dentistry에서 머문 두어 시간은 어제의 정신적 및 금전적 충격을 치유하고도 남을 정도로 가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박물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면, 먼저 박물관 명칭에 치과의사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그 이유는 소아치과 분야에서 꽤 유명한 Samuel Harris(1903-2003)가 기증한 백만 달러를 기반으로 하여 1996년 치의학 박물관이 개관되었고, 현재는 스미소니언(Smith- sonian) 재단이 관리하는 박물관에 포함되어 있다. 세계 최초의 치과대학인 메릴랜드 치과대학(구 볼티모어 치과대학) 본관 건물 1층과 2층에 꾸며진 치의학 박물관은 아마도 세계 최고의 치의학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신 스승이신 이상호 교수님과 10년 전에 치과 박물관에 눈을 뜨게 해준 Samuel Harris의 초상화 앞에서 찍은 사진이 나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현재의 메릴랜드 치과대학은 치의학 박물관 말고도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있다. 메릴랜드 치과대학의 전신인 볼티모어 치과대학(Ba
미국의 5월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이었다. 시인은 이런 날에는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하였는데, 필자는 특별한 두 분과 함께 치의학을 찾아서 7박 9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목적지는 3곳이었고 모두 치의학 박물관이었다. 첫 번째 장소는 미국 동부 메릴랜드주(Maryland) 볼티모어(Baltimore)에 있는 Dr. Samuel D. Harris National Museum of Dentistry,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은 미국 중북부에 있는 미시간주(Michigan) 앤아버(Ann Arbor)의 Sindecuse Museum of Dentistry, 여행의 마지막 대미는 미국 중동부 오하이오주(Ohio)의 작은 시골 마을 베인브릿지(Bainbridge)에 있는 Dr. John Harris Dental Museum이었다. 볼티모어의 메릴랜드 치과대학에 있는 치의학 박물관은 2008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 소아치과학회를 참석하는 동안 첫 방문이 이루어졌다. 호기심 차원에서 들렀던 치의학 박물관은 필자에게 새로운 지평을 안내하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치과박물관’과 ‘치과의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최근 몇 년 동안 세계 치의학
10년 넘게 헬스클럽에 미쳐, 헬스클럽이 문을 닫는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엿새 꼬박 운동을 하는 지금의 나한테는 전혀 안 어울리는 창피한 사연을 하나 간직하고 있다. 사실 헬스만 하더라도 난 전혀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공동개원을 했던 2,000년대 초에 동업자이시던 임 원장님에게 끌려 가다시피해서 시작을 하게 됐고 그게 결국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움직이기를 싫어하던 것은 아마도 나의 천성이었으리라… 사실 그 움직이기 싫어하던 천성은 선친 덕분에 얻어 가지게 된 것인 바, 부산에서 선친이 1950년대 말에 대전으로 이사를 오시게 되었고, 살림집으로 고른 건물이 내가 출생했던 반 일본식으로 지어진 2층집이었는데, 갓 대전에 오셨던 선친은 그 지역이 소문난 적선지대임을 전혀 모르고 구입하셨고, 나중에야 이를 아시게 된 선친은 우리 4남매의 외출을 엄격히 금지하시는 것으로 당신의 큰 실수를 만회하려 드셨다. 우리 4 남매는 등·하교를 제외하고는 일요일조차 외출이 금지되어 드넓은(?) 마당에서만 뛰어 놀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나마 이웃과의 토지소송으로 드넓었던 마당마저 빼앗기게 된 후, 활동(?) 영역이 더더욱 축소된 우리는 1층 현관에서 창
가까운 거리에 계시는 서제교 원장님과 자주 저녁 식사를 하며 일상을 주고 받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 ‘자주 만날수록 정이 깊어지고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재미난 얘기를 ‘당신과 나 사이’를 인용하며 들려주셨다. 내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며, 평생 뒷바라지하며 젊은 세월 다 보내고 숨 고를 시간이 되니 품 떠난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가지만 부모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다. 그 책을 읽고 나서 ‘거리’란 시를 쓰게 되었다. 거리 너와 나의 거리는? 46센티미터 이내였으면 그 보다 더 가까웠으면 입 맞출 수 있는 당신, 그리고 내 아이들 영원히 46센티미터 이내인 줄 믿으며 지금까지 살아온 나 꿈이고 착각이여라 자라서 때가 되면 46센티미터가 넘어 1.2미터가 될 것을 왜 몰랐던가? 마주보는 친구 사이의 거리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서로 배려하는 사이의 거리 그것만으로 감사히 여겨야지 이제야 깨닫는다. 친구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를 더 다가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 꿈꾸지 말고 1.2 미터 넘는 사이되지 않길 (김 혜남 ‘당신과 나 사이’ 메이븐 2018, 64쪽 참고) 이광렬 시집 ‘고래의 꿈’ 중에서 비록 지금의 빈자리가 외롭고, 공허함을 느끼지
제목 그대로 계속 길을 걷는다. 소설의 전체 분위기는 자주 나오는 ‘ash’라는 단어처럼 회색 암울……. 그리고 처음부터 거의 마지막까지 아버지와 그의 어린 아들과의 대화로 전개된다. You wanted to know what the bad guys looked like. Now you know. It may happen again. My job is to take care of you. I was appointed to do that by God. I will kill anyone who touches you. Do you understand?(father) - p77 You have to carry the fire.(father) I don’t know how to.(son) Yes you do(f) Is it real? The fire?(s) Yes it is.(f) Where is it? I don’t know where it is.(s) It is inside you. It was always there...(f) ... ...You have my whole heart...(f) ... ...Who will find the little boy?(s)
어느새 봄날이 간다. 올해로 한도치과에서 치과간호조무사로 일한지 16년째다. 가정형편상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고 내 나이 26살에 차선으로 선택한 직업이 간호조무사다. 그 후 잠깐 치과간호조무사로 취업을 했었지만 결혼과 육아로 휴직할 수밖에 없었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사업을 도왔다. 결혼 후 남편의 잦은 직종 변경으로 지금의 한도치과 2층에 비디오 대여점을 하고 있었는데 원장님께서 내가 치과조무사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는 치과 일손이 부족하다며 ‘치과에서 잠깐 아르바이트를 해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거의 10여년을 쉬고 있었기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전문적으로 배웠던 간호조무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원장님의 제안을 받아드렸었는데 생각하면 이 때 내가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울 때였기도 하다. 오랫동안 쉬고 있었기 때문에 치과의 모든 업무는 낯설고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배웠던 전문지식으로 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뿌듯하고 고맙기만 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원장님과 동료들에게 참 감사하다. 치과업무에 어설펐던 나는 환자와 함께 일하면서 참 많은걸 배우고 느꼈다. 그 당시
나도 어릴 적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꿨다. 아니, 백마탄 왕자님한테 기대어 왕비가 되지 않더라도 어느 날 나에게 인생역전의 행운이 찾아오기를,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며 살았다. 부족하진 않았으나 여유롭지 못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의 빚의 무게만큼 삶의 무게를 너무 일찍 알아버려서 일까?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도 대부분 한사람의 성공스토리에 관한 일대기 영화, 신데렐라 스토리와 같은 것들 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영화들이 실제로 그랬다. 언제나 주인공은 많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거나 성공했다. 그래야했다. 그런 것들이 더 재미있고 극적이니까. 그리고 그런 영화와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나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집에 돌아와 현실을 마주하고 직시할 때면 더 큰 허탈감과 좌절감이 밀려왔다. 나는 무엇을 꿈꾸며 사는가. 시린 겨울 코트도 없이 낡은 기타와 우연히 떠맡게 된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인 포크송 음악가 르윈 데이비스는 돌아갈 집도 없이 매일 매일 지인의 소파를 전전한다. 듀엣이었던 그의 음악 파트너는 자살했고 그의 레코드판은 먼지만 쌓여간다. 절망 말고 그에게 남은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