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년만에 서점을 들렀다. 맨날 핸드폰, 아이패드만 쳐다보며 살아서 어디 쓰겠나. 아무리 21세기를 살고 있는 문명인이라고 하지만. 시간나는 주말에 어느 카페에 앉아 바닐라라떼 된장스러운 맛을 느끼며 책 한권 올려놓고 폼 잡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는 생각에 들러보았다. 썩 눈에 들어오는 폼스러운 책 표지 하나 없어 실망하던 가운데 ‘82년생 김지영’ 제목 한번 느낌있군. 나보다 4살이나 많은 저 누나는 무슨 생각이 많으셔서 저렇게 나이랑 이름 알리고 책을 쓰셨을까 궁금하여 잠깐 들어보았다가 이내 잡지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제목만 기억난다. 86년생 김태흥. 요즘 나도 저 누나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이에 걸맞는 고민이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새.치.’ 하루 하루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뽑아도 뽑아도 자꾸 비집고 올라오는 이 얄미운 놈들 덕분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괴뢰군 같은 것들. 거울 볼 때마다 한숨도 늘어간다. 이게 바로 33살의 모낭인가. 미용실 누나, 33살들도 새치 염색 많이 하나요? 치욕스럽지만 머리 자르러 가서 차분하게 한번 물어나 볼까. 염색은 무슨,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한데 드레싱만 반복해서 무얼하나 따위의 생각
“음악이 사랑을 살찌우는 양식이라면 계속해다오. 질리도록 들어 싫증이 나버리면 사랑의 식욕도 또한 사라지고 말 것이 아니냐. 다시 한 번 들려다오. 아스라이 사라지는 선율, 귓가에 감미롭게 들린다. 흡사 제비꽃 피는 언덕 위의 미풍이 몰래 꽃향기를 훔쳐 싣고 오는 것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조선치대 관현악반 40주년 정기연주회가 끝난 지 벌써 50여 일이 지났습니다. 매일 밤 연습이 끝나면 귓가에 들려오던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예술극장을 가득 채우던 음악들의 선율은 아스라이 사라졌지만, 가을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저미어 여전히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귓가에 감미롭게 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40주년 정기연주회’에서 지휘자라는 영광스러운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제게 무한한 기쁨이며, 감사의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지휘자라는 자리가 저의 개인적인 능력의 범위를 넘어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져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올해 여름은, 40주년 정기연주회를 시샘이라도 하는 듯, 기록적인 폭염을 기록하며 너무나 더웠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부족한 지휘자를 믿고 다시는 오지 않을 청춘의 여름을 연습하며 보내준 단원들과 물심양
조선대학교 치과병원이 올해로 개원 40주년을 맞았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불혹.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이르기를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는 나이를 바로 40세”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공자의 말씀처럼 조선대 치과병원은 지난 1978년 개원한 이래 지역사회 구강보건 향상에 꾸준히 기여해 왔으며, 나는 이 치과병원에서 지역사회 일원으로서, 치의학을 배운 학생으로서, 현재 수련하고 있는 전공의로서 40주년을 남다른 의미로 맞고 있다. 사실 조선대 치과병원과의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조선대 치과병원과 현재의 조선대 치과병원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라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현재 40만 번의 병록번호를 눈앞에 둔 병원에서, 엄마 손에 이끌러 온 나는 10만 번 초반 대 병록번호를 갖는 어린 환자였고, 치과병원에 왔을 때는 시설이나 규모도 현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실제로 과거 병원 정문은 조선대학교 병원 내 자리 잡고 있어 정문부터 한참 걸어 올라가는 속칭 ‘헐떡고개’를 올라 힘겹게 치과를 다녔다. “그 때 힘겹고 혹독한 등반수련(?)이 지금의 왕성한 심폐 기능과 지구력을 갖는데 큰 도움이 되
‘너는 치대 왜 왔니?’ 필자가 예과 1학년이던 시절 동아리 모임자리 마다 들었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매 번 듣는 질문이었지만 뚜렷한 비전이나 가치관 없이 치과대학에 진학했던 필자는 의대랑 치대 고민하다가 치대왔다는 변변찮은 대답만을 하면서 질문을 무마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필자가 속해 있는 단국치대 기독교 동아리 Christian Medical Fellowship(이하 CMF)에서는 매해 여름 의료선교활동을 진행해왔다. CMF 치과 선교팀에서는 주로 국내에서 장애인분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분들을 무료 진료하는 의료선교활동을 해왔는데, 치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참가했던 예과시절에는 안내와 진료기구소독으로, 본과 3학년 이후에는 간단한 스케일링 등의 진료로 섬기면서 나의 조그마한 노력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 왔었다. 본과 4학년이 된 올해에는 지난 7월 31일에서 8월 5일까지의 일정으로 필리핀 바기오로 의료선교를 다녀왔다. 보철과 송영균 교수님의 지도아래 치과의사 선배님 두 분과 CMF 학생 12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CMF 의료 선교팀은 바기오 치과대학의 학생들, 그리고 바기오 현지의 ‘즐거운 치과’ 스탭
‘제멜바이스 반사작용(Semmelweis Reflex)’ 일반적인 사람들, 우리나 나 자신의 세계관과 맞지 않거나 다른 데이터를 무시하는 경향을 ‘제멜바이스 반사작용’이라고 합니다. 통상적인 기존의 규범, 믿음, 패러다임과 상충되는 새로운 데이터를 거부하려는 반사적인 경향을 말합니다. 제멜바이스는 19세기 무렵 헝가리 태생의 Dr.(산부인과)입니다. 예전 우연히 읽었던 ‘의사들의 전쟁’이란 책에서 이 Dr. 이야기를 처음 접했습니다. 말년을 가족에게서 조차 인정받지 못해 버림받고 정신병원에서 인생을 마감했지만, 지금 헝가리 부다페스트엔 자신의 이름을 딴 명문의과대학인 ‘제멜바이스 의과대학’이 있습니다. ..(..).. ‘의사들의 전쟁’ 19세기 무렵까지 외과적 수술은 유럽에서도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제대로 된 소독개념이나 감염차단에 대한 학문적, 임상적 체계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술이 잘 돼도 수술부위 감염에 대한 합병증(특히 패혈증) 등으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산부인과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출산 후 산욕열(Puerperal fever)로 죽어가는 산모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멜바이스는 산욕열의 주요원인 중의 하나로 의사들이 해부학 실습시체
지금은 폐간 되었지만 한국치과공론사에서 발행한 ‘한국치과공론’ 제1권 제4호 1965년 9월호 p.39에는 ‘시멘트 금수 해제에 전력 경주’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습니다. 『국산 징크 시멘트 수입 금지의 건 ; 작년 11월 보사부로 부터 징크 시멘트외 5종목에 대하여 금수 가부 문의를 받은 대치협은 시멘트와 매몰재는 금수를 반대하고 파라핀 왁스는 일부 해제키로 하며 쏠다 메탈, 카랏트 메탈, 케스팅 아로이 등 종목은 금수를 찬성 한다고 답신한 바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역전되어 1965년도 수입 계획에서 시멘트 수입이 금지 되었으니 대치협의 위신은 형편없이 된 셈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쏠타 메탈외 2종목의 금수 가결을 했는지 모르지만 대보사부 절충이 미온적이었음은 부인하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더구나 대치협 기관지인 대한치의보에 국산 징크 시멘트의 FDI 불합격 기사를 게재하면서 그 광고란에서는 동시멘트는 미제와 동일하고 일제 보다는 우수하다는 과학적 결과가 판명되었다고 광고케 하였으니 이와 같은 이율배반적이며 무책임한 행위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작년도에 시멘트 금수 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당시의 시멘트 금수로 말미암아 전국 치과의사
아프리카 섬나라 마다카스카르에 강의와 오지진료를 다녀왔다. 마다카스카르 치과의사협회의 학술 행사에 공식 연자로 초정받아 방문하였다. 그리고 부시맨 닥터, 낭만 닥터로 이 나라에 오지 진료를 하고 있는 외과의사 이재훈 선교사와 함께 1주간 오지의료 봉사를 체험하였다. 마다카스카르는 인구 2600만명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섬나라이다. 우리에게는 할리우드 만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의사 수는 3500명 정도이고 치과의사 수는 1200명 이라고 한다. 치과대학에서 1년에 졸업하는 치과의사는 25명이 배출된다고 한다. 의사는 대부분 공직을 선호하고 실제 개업하는 의사는 이보다 적다고 하였다. 치과의사 개업의는 수도 안타나나리보에 1000명정도다. 수도를 제외한 지역은 마다카스카르인들은 치과진료 자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2016년에 처음 마다카스카르의 치과의사협회의 공식초청으로 학술대회에 공식연자로 참석하고, 올해 두번째 연자로 강의를 하였다. 첫번째 학술대회의 연자는 두바이 대학교수가 참석하였으나, 불행이도 유방암으로 사망하여 더 이상 강의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외과의사 이재훈 선교사의 주선으로 제2회 학술대회부터 올해 제3회 학술대
몇 년전 “꽃보다…”시리즈 중에 가장 조용한 반응 이었지만 나에게는 가장 핫한 시리즈가 “꽃보다 누나”였다. 그 중 단연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윤여정이라는 노배우의 저녁 인터뷰였다. 매번 여행이 끝난 저녁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삼아 그날의 여행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인터뷰는 노배우가 여행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그 중 가장 마음을 사로 잡는 그녀의 인터뷰 내용은 인생을 바라보는 굴곡진 한 여배우의 인생에 대한 시원하고도 따뜻한 위로였다. “60이 되어도 인생을 몰라요,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그래서 아쉬울 수 밖에 없고 아플 수 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 하나씩 내려놓는 것 포기하는 것 나이 들면서 붙잡지 않는 것… 아쉽지…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고 내 인생만 아픈 것 같고… 다 아프고 다 아쉬워.” 그녀의 삶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남긴 이 한마디는 실수하고 넘어지고 우는 내 인생에 큰 위로가 되었다. 처음 치전원을 결심하고 학원을 상담하던 날 부터 내 인생 처음으로 뒤처진 인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이 들어 시작하는 생활은 내 과거 10년
“이런 창살 없는 감옥에서 내 인생을 보내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이 말은 30년 전쯤 치료차 왔다가 나의 진료 모습을 보고 어느 지인이 한 말인데 그는 치과대학을 지원했다 낙방하고 2지망으로 생물학과 교수가 된 분이었다. 우리는 평생 그가 말하는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아가야 한다. 일탈을 꿈꾸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이번 여름휴가는 주말을 이용해서는 갈 수 없었던 남한강 상류 고적답사 여행이었기에 정선을 베이스캠프로 영월, 태백, 단양, 제천 등지를 돌아 볼 생각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여행은 기대와는 달리 처음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드라이브를 즐기던 중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출발 전 경비 장치를 걸어 놓으라고 당부하여서 애써 걸어 놓았는데 그만 두 번 눌리는 바람에 걸렸다 풀렸다는 경비업체의 전화였다. 아내의 볼멘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한동안 입품을 팔아야 했다. 그것도 잠시, 휴게소에서 카드를 분실하는 사고를 또 친 것이다. 휴가 내내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데 호텔 룸 키를 가지고 내려오지 않아 새벽 다섯 시에 자는 아내를 전화로 불러내려야 했고, 주유소를 지나쳐 다음 주유소까지 마음 조이며 갔던 일 등… 나이 탓이려니 자위해 보지
버스 한 번에 지하철 2번을 타면 도착하는 제 직장은 ‘정원치과’입니다. 2017년 3월 정원치과에 경력자로 입사하여 3일째 근무하던 날, 원장님께서 진료 팀장 자리를 제안하셨습니다. ‘팀장’이라는 직책을 보고 배운 적 없었던 저에게 그 제안은 낯설기도 흥미롭기도 한 정원치과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많지 않았던 임상 경험, 입사 후 맞춰가는 원장님과의 호흡, 나보다 먼저 입사한 진료팀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일들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때 팀장이라는 자리에 나만의 색을 입혀 가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업무일지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손이 기억해서 따라가는 습관들, 원장님과 진료적인 오해가 생겼던 부분, 그리고 의도하지 않았던 실수 등에 대한 마음을 업무 일지에 고스란히 담아서 원장님께 들려드렸고, 그런 저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원장님께서는 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내용을 읽어보시고, 항상 가슴 따뜻한 피드백을 전해주셨습니다. 일지를 쓰는 초반에는 힘들고 지친 업무에 일지까지 더해져 컴퓨터 앞에서 잠이 든 적이 많았습니다. 언제부터 업무일지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당연한 습관이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일지를 쓸수록 팀장으로서 달라지는 제
가정주부로는 안방 드라마로 사극은 별로인 시절 MBC 드라마 ‘선덕여왕’은 시청률 1위로 특히 주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며 특히 ‘선덕여왕’과 ‘미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에 법조계도 여성의 진출이 눈에 띄게 높아졌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서울대에서는 여학생들의 입학률을 높이고자 가산점을 준 해도 있었습니다. 일본은 지난 8년간 도쿄의대가 신입생을 선발할때 여성 수험생들의 점수를 일률적으로 감점 했다는데 이는 결혼, 출산으로 이직이 잦아 병원인력 수급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일보 08. 8.3 일자. 제 30342 호 이하원 특파원) 그런데 치대가 6년제로 되면서 여학생의 수는 눈에 띄게 감소하여 어떤 학년은 여학생이 한 사람 뿐인 때도 있었습니다. 70년대 초 해외에 나갔을때 치대의 여학생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놀란 적도 있었는데 그 만큼 남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분야(특히 육체적인)가 다양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대학에서 여학생 수는 1980년 4명, 1981년 6명, 1982년 3명 이던 것이 1983년 12명, 1984년은 30명,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