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중순 양산의 날씨는 아주 추웠다. 해가 쨍쨍하게 떠있는 점심시간에 두꺼운 외투를 입고 밖을 나왔는데도 말이 덜덜 떨리면서 나올 정도였다. 양산에 온지 이제 2년이 다되어 가지만, 양산이 이렇게 추운 곳이었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그래서 잘 이용하지 않던 녹차 티백을 텀블러에 넣어두고 마시면서 추위를 녹이고, 지나가다가 어디 난로라도 있으면 잠깐 곁에 서서 난로를 쬐었다. 가끔 나도 잊고 살지만, 나는 강릉원주대학교 치과대학 출신이다. 강릉원주대학교 치과대학은 양산보다 한참 북쪽에 있는 강릉시에 위치하고 있다. 강릉시청 홈페이지를 들어가 강릉 기후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았다. “강릉시는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는 백두대간의 동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해안에서 6km 떨어져 있어 해양성 기후 특성을 나타낸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으로 강릉시는 같은 위도선상의 타 지방에 비해 겨울철은 온난하고, 여름철은 비교적 시원한 편이다.” 나는 학창시절 다른 과목에 비해 국어를 잘 못하는 편이었는데, 그 당시 이 문구를 읽었다면 강릉의 추위에 대하여 과소평가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만 읽고 ‘음 강릉은 겨울에 온난한 곳이구나’라고 하면 곤란하다. 글을 쓰고
1990년대 ‘좀비(Zombie)’라는 노래로 큰 인기를 누렸던 아일랜드 출신 록 밴드의 싱어가 아직 젊은 중년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 프로와 아마추어들 구분 없이, 여성 보컬이라면 누구나 이 가수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의 창법을 ‘흉내’냈고, 이들의 히트곡 ‘좀비(Zombie)’는 프로나 아마추어 밴드의 단골 카피(copy) 공연곡 이었다. 노래의 음역대가 높고 연주자체가 어렵거나 곡이 난해한 건 아니지만 제대로 분위기를 내는 밴드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만큼 크랜베리스(The Cranberries)의 싱어 ‘돌로레스 오리어던(Dolores O’Riordan)’의 보이스 컬러는 ‘넘사벽’에 가까웠다. 마치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스테어 웨이 투 헤븐(‘Stairway To Heaven(Live))’의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처럼. 이 특이한 듯 매력적인 목소리. 반주 없이 불러도 충분한 소울감과 바운스가 느껴질 것 같은 목소리를 가진 한 사람도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한때 너바마(Nirvana)의 음반 ‘네버마인드(Nevermind)’를 열심히 들었다. 이를 뛰어넘을 음반이 나올
프랑스 여행 첫날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놓쳤다. 공항에서 울며 고민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새로운 비행기표를 구매해야 할지. 어느 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번 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다고 했다. 여러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네 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공항 사건을 포함한 지난 여행에서 일어난 일들도 오직 한번 뿐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결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일까. 내 여행은 가벼웠다. 주머니 사정도 그랬고 계획도 그랬다. 비행기를 놓치고는,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공항에서 당일 출발하는 파리행 비행기표를 사느라 비행기에 앉아 보기도 전 여행 예산의 반을 이미 탕진해버렸다. 게다가, 설상가상 여행 4일째 가방을 도난당하는 사건으로 주머니가 2/3쯤 가벼워진 상태였다. 비행기표 가격은 추석 직전이라 어마어마하게 사악했다. 11시간 비행 내내 잠이 한 숨도 오지 않았는데,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가벼워진 주머니 때문
일요일 아침은 다양한 사람들의 향기로 어우러진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을 안고 있는 사람들.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 삶의 최전선에서 홍보물을 나눠주는 사람들. 다음 단계의 안락한 삶을 위해 영어공인시험을 보러 가는 사람들. 일찌감치 한적한 교외에서 여유를 만끽하려고 부지런을 떠는 사람들. 주중에 쌓인 피로를 주말 내내 늦잠으로 해결하는 사람들. 평일 아침, 출근으로 바쁜 사람들의 일률적인 모습에 익숙했던 지라, 일요일 아침 거리를 채우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행복”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마케팅 석사과정 중 가장 관심 있던 주제가 바로 “행복이 소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무언가를 더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우리를 행복의 길로 안내해준다 여긴다. 사람들은 더 좋은 직업, 더 좋은 친구, 더 좋은 성적, 더 좋은 집, 더 좋은 자동차 등 욕망하는 무언가를 통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애써 믿고, 그 연장선 상에서 동기부여와 자기계발을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것이리라. 행복수업으로 유명한 서울대 행복연구센터 최인철 교수는
2016년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2017년을 설계하던 일이 어제 같은데 새털 같이 많아 보이던 2017년도 며칠 남지 않아 아쉬움만 가득하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니 연초에 계획했던 많은 일 중에 순탄하게 풀린 일도 있었고, 시작과 동시에 얼마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중단된 계획들도 있어, 이맘때쯤이면 만족감과 아쉬움이 함께 공존한다. 계획대로만 풀리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인생이라는 게 시행착오를 거치는 묘미가 있기에 그것만의 매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며칠 전 점심을 먹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부리다 문득 시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왜 이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빠를까?” 아주 어릴 적 아버지가 길게 출장 가시던 첫날. 첫 날부터 출장에서 돌아오시던 날까지 하루하루 새는데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하루 지날 때 마다 어머니께 아빠는 언제 오냐고 연신 질문을 던진 기억이 난다. 그때는 하루가 1년 같았고, 1년이 10년처럼 느껴졌다. 그런 시간들이 성장함에 따라 점점 빨라지더니 지금은 일주일이 마치 하루처럼 느껴지고, 1년이 일주일처럼 느껴진다. 시간의 속도는 10대에는 10km, 20대면 20km… 각 세대 숫자에 맞게 시간의 속도가 증가한다는 재미있는
얼마나 됐을까? 한 2년쯤 된 것 같다. 어느 날 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 간결함이 좋았다. 스크롤의 압박이 없었다. 단숨에 읽히고 무엇인가 가슴에 남기도 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청량감을 주기도 했다. 시는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치유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 시는 작은 공감의 언어였다. 가끔 시집을 사서 읽기도 했다. 누군가 오래된 헌책방에서 가성비 최고가 시집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참이다. 마음을 무찔러 들어오는 시어를 만나는 작은 즐거움이 있었다. 점차 나만의 언어로 시를 쓰고 싶어졌다. 그냥 형식없이, 마음에 느껴지는 대로 적었다. 일기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독후감도 아니고, 시만이 지닌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 시를 지었을 때의 상황, 느낌, 생각 등이 시어에 녹아있다. 그럼에도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가지게 하는 매력이 있다. 제 삼자가 보았을 때는 또 다른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한다. 아마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나 자신도 다르게 느끼고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점이 좋다. 시에 그림이 같이 곁들여지면 좋겠지만 아직 그림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시도 처음 싱글크라운 프렙할 때의 서투름이 두루 배어 있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
한 노숙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치아가 한 개도 없었지만 웃는 모습이 정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기증받은 빵 가운데 부드러운 부분만 골라 가져다주면 어찌나 고마워했는지 모릅니다. 낮에는 노숙인 상담소 근처를 서성였는데, 믹스 커피 한잔을 타다 건네면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좋아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갓 대학생이 된 햇병아리 상담원의 인사를 처음으로 밝게 받아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와의 첫인사에 무슨 말을 했었나 정확히 떠올릴 수는 없지만, 그의 환한 미소가 잊히지 않습니다. 유난히도 춥던 어느 겨울날, 그는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상담원의 걱정에 감기가 걸렸다고 답하곤 힘없이 몸을 뉘었습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그는 음수대 근처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행려자로 분류되어 일정 행정 절차를 거친 뒤 무연고 화장 처리되었습니다. 거리에서 경험한 첫 죽음은,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괴로워할 새도 없이 또 다른 죽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괴로움은 화로 변했습니다. 신은 이미 화풀이의 대상으로 전락해서, 그에게 기도할 때면 육두문자가 섞이곤 했습니다. 하루하루 성장하여 6개월쯤 지나면 성인군자가 되어 이곳을 떠날 줄 알았
지난 11월 18, 19일 1박2일에 걸쳐 치협 대외협력위원회의 ‘닥터 자일리톨버스가 간다.’ 지방 의료봉사가 있었다. 대치 최치원 부회장, 김소현 자재 표준이사, 차순황 대외협력이사, 그리고 대외협력위원인 나까지 포함하여 4명의 의료진, 대치 남궁원차장, 허현정대리 등 지원인력, 그리고 진료보조인력 4명이 참여하여 규모가 꽤 큰 봉사가 되었는데 여기에 전라남도 윤헌식 총무이사와 오승석 사무국장까지 이틀에 걸쳐 합류하여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의료봉사 장소는 목포시 대양산단 옆에 위치한 소망 장애인 복지원이라는 곳으로 대양산단이 만들어지기 한참 전인 1996년에 설립되어 소망 자립센터, 소망 노인전문 요양원의 3개 시설을 운영하는 곳으로 2002년에 내가 유니트 체어를 기증하고 10년간 월 2회정도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다니다가 5년 전부터는 후배인 장성호 원장이 진료봉사를 다니는 곳이다. 얼마전에 시설이 대양산업단지 용지에 편입되어 바로옆으로 신축이전하면서 보담 하우스라는 중증 와상 환자 전문 요양 설까지 확충하여 4개의 시설을 가지고 있는 목포에서 규모가 꽤 큰 곳이다. 이번 봉사에서 차순황 대외협력이사가 발벗고 나서서 O사의 유니트 체어를 무상기증으로 받
우리는 자라오면서 각자 많은 꿈을 꾸었을 것이다. 어떤 꿈은 오랫동안 간직됐을 것이고, 어떤 것은 그냥 재미있는 상상으로 끝났고, 또 어떤 것은 눈물을 삼키며 접었던 상처로 남은 꿈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50대의 복판으로 와버린 나는 기성세대로 분류되고 꿈을 꾸기보다는 젊은이의 꿈을 재단하고 그들의 생각을 억압하는 일명 ‘꼰대’로 불리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꿈이 없을 리가 만무하고 100세 노인에게도 꿈을 물으면 분명 그만의 꿈을 말하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 간의 갈등을 부인하지 못할 현실적인 상황은 늘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다. 문화계의 블랙리스트는 지금도 언론에 나오고 있으며 수사가 진행 중이다. 블랙리스트가 세대갈등과 꿈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궁금한 분도 있을 것이다. 블랙리스트는 권력을 가진 자가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권력은 대부분의 젊은이에겐 아직 허락되지 않은 힘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크다고 하겠다. 기성세대는 항상 젊은이에게 꿈을 가지라고 주문한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전제조건을 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게 상당히 모순관계라는 것이 문제점이다. ‘헤르만 헤세’는 전 세계에서 사랑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첫 기억은 이렇다. 5살 때 쯤 살고 있던 아파트에서 혼자 나와 아파트 앞에서 뒤돌아 봤던 기억. 사실 이 기억이 왜 이렇게 강렬하게 남아있던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렇게 뒤돌아봤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막 20대 중반에서 후반에 접어든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는 것 같다. 내 기억 속에는 대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보다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기억들이 더 많이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릴 때는 추억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입학식날 교과서와 공책을 따로 구분하지 못해 울었던 기억, 공부 보다는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여기 저기 놀러다녔던 기억이 어릴 때 기억이라면 고등학교 때 나에게 남아있는 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생활, 공부, 잠 이정도 수준이였고 매일 매일 똑같은 삶의 반복이였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여유가 없어지고 바쁜 삶에 행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병원에 들어오고 나
아침잠을 깨우는 알람이 울리면, 가장 먼저 라디오를 켠다. 그 안에는 나보다 훨씬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사연들로 가득하다. 아침 일찍 도매 시장에서 싱싱한 야채와 생선을 사 오는 식당 주인, 고소한 향이 솔솔 나는 빵을 구워내는 제빵사,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들뜬 마음으로 출근을 하는 신입사원. 오늘 하루도 잘 지내보자는 각자의 희망과 작은 다짐들로 아침이 시작된다. 나는 거의 10년 간 텔레비전 없이 지내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타지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텔레비전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것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져 당연하게 되었다. 그 대신 고등학교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몰래 듣기 시작하던 라디오가 그 빈자리를 채워준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진행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같은 반 친한 친구가 사연을 보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수능 파이팅 이런 내용이지 않았을까. 그 때 친한 친구들의 별명을 쭉 써서 보냈는데, 어쩌다보니 별명이 죄다 동물 이름이었다. 그걸 읽은 DJ가 ‘여긴 동물의 왕국이네요’라고 한 말을 두고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내내 키득키득하며 즐거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