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20년 전 개원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47번 치아에 신경이 쓰일 정도의 통증을 겪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다가도 씹을 때면 느껴지는 시큰함. 멀리 있는 선배에게 전화로 증상을 호소했더니 cracked tooth syndrome이 의심된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토요일, 그 선배는 서울에서 내가 있는 대구까지 직접 왕진을 오셨다. 진료의자를 선배에게 내어드리고 유니트체어에 누었을 때의 안도감, 치아 삭제 후 임시로 씌워진 SS크라운으로 처음 씹었을 때의 사라진 통증에 대한 신기함 등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된다. 에피소드 2. 2주전 토요일 오후, 자극적인 매운 음식을 먹는데 갑자기 예의 47번 치아에 심한 통증이 느껴지더니 그 이후 계속, 물 등 액체 종류가 닿으면 통증은 반복되었다. 며칠을 견디다가 갓 개원한 후배의 치과를 찾았다. 후배는 크라운을 제거하고 레진코어 수복 후 레진임시크라운을 장착해주었다. 아직도 가끔은 자극에 심하게 시리지만 후배의 권유대로 예후를 관찰 중에 있다. 20년 전, 멀리까지 달려와서 치료해주신 선배에게 당연히 감사한 마음은 가졌었지만, 개원의가 하루의 진료를 포기하고 낯선 곳에서 진료를 베
치과계에 직원 구인난이 문제다. 치과뿐이 아니고, 치과기공소에서도 적은 월급과 강한 노동 강도로 인하여 신규 젊은이들이 일하길 꺼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1, 2년 내에 기공소에서도 신규인력을 채용하지 못하여, 인건비가 많이 드는 골드 보철물이나 도재치아 보철물, 틀니 등은 제작 포기를 하거나, 기공료 대폭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젊은이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자리를 싫어하는 게 문제라고 치부하는 것으로는,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치과근처에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 점심시간에 한두 테이블 손님을 받고 있으면서 점심장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인건비나 나올까 걱정스러운 곳들이 있었다. 올해 들어 최저임금이 급격하게 올라서 그런지 최근에 점심장사를 포기하고 저녁장사만 하겠다고 써 붙인 곳이 늘어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식사 값을 올려서 받는 식당이 늘어났다. 11시 장사를 시작하던 곳이 오후 3시 시작으로 변하였고, 1500원 김밥집이 3000원 프리미엄 김밥집으로 변했다. 12시간 노동을 시키면서 적은 인건비로 유지되던 식당들은, 늘어난 인건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손해나는 시간에 장사를 포기하고
평범한 단어에도 맨 처음을 의미하는 ‘첫’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뭔가 더욱 설레고, 긴장되고 애틋한 느낌이 든다. 첫 단추, 첫 눈, 첫 만남, 첫 환자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만든 첫 의치. 지난 5월의 어느 날, 1년차 초반 이제 막 의치를 주소로 내원하는 신환들을 받기 시작하는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위, 아래 틀니를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내원하셨다. 고령의 나이에 비해 정정하시고 보호자분도 없이 혼자 내원하신 할아버지는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하셨다. 기존의 의치는 사사로 제작하셨으며 10여 년간 사용하셨다고 했다. 대학병원에 내원하시는 다른 흔한(?) 무치악 환자분들처럼 하악의 심한 치조제 흡수로 구내검사 후 내가 새 의치를 잘 만들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기존 사용하고 계시는 의치에 비해서는 조금 더 잘 만들어 드릴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들기도 하였다. 보호자분도 없이 귀도 잘 안들리시는 상태라 치료과정, 치료 기간, 비용, 예후 등에 대해 겨우 겨우 설명 드렸는데 할아버지는 나의 설명과는 상관없이 여기서 틀니를 새로 만들겠다는 답은 이미 정하신 상태였다. 그렇게 할아버지와 나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귀가 잘 안 들리시는 할아버지께
이 흰 가운을 입기 위해 정말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가운식에서 축사를 보내주신 교수님께서는 3학년이 된 지금, 우리 학생들은 ‘팔부능선’을 지났다고 하셨다. 수많은 시험과 실습을 지나며 아무것도 몰랐던 학생이 전문인으로서 치과의사의 목표지점까지 한 발짝 다가서게 되었다. 가운식은 지난 치대에서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다짐을 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가운식까지의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먼저 든 마음은 나의 평생에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께 대한 ‘감사함’이었다. 입학 전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학교에 원서를 접수하던 시절 합격에 대해 정말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어릴적 동화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 하면 주저 없이 ‘치대 합격이요’라고 말했을 것 같다. 스스로도 이런 간절함이 있었지만, 부모님과 가족들은 나와 함께 그 간절함을 공유해주셨고, 아낌없는 지지와 지원을 보내주셨다. 가운식은 그 영광의 자리에 참석해주신 가족들께 감사함을 전할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가 되었다. 입학 전에 감사할 분들이 있었다면, 입학 후에는 밤낮없이 학생들의 지도를 위해 힘써주신 분들께도 깊은 감사함을 품고 있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가 했다. 도대체 영미가 누구이기에 저리 애타게 부를까.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컬링을 더 눈 여겨 보게 된 까닭에는 이 ‘영미’에 대한 호기심도 한 몫 했다. 이 후, 영미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게 되었음에도 관심이 식지 않고 더 흥미를 끌었다. 팀킴(Team Kim)이 영미, 영미 친구, 영미 동생, 영미 동생의 친구로 이루어졌다는 부분도 재미있었다. 게으른 관중인 탓에, 실제 선수들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선수들 사이에서 들리는 경북 사투리는 외국 선수들이 내뱉는 외국어 사이에서 묘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외국 여행 중에 맛보는 토종 음식이랄까. 하지만, 이것만은 아닐 터다. 형언하기 힘든 강렬한 팀플레이, 신뢰, 유대감 같은 뜨거운 것이 있었다. 2월 25일 폐막식을 끝으로 평창 올림픽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넓은 올림픽 경기장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뛰어다니던 소년, 올림픽하면 나는 이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30년이 지난 지금 소년은 아마 40 전후의 나이가 되었으리라. 특별한 기대 없이 이번 올림픽을 덜컥 만났다. 호불호를 떠나 눈길을 사로잡는 인면조에 웃음을 터트리고 기네스북에 등재된다는 드론 오륜기에 놀라고 정선아리랑이 울려
2015년 늦가을 서울대 총동창신문 부고란을 보고 C교수(최선진 교수)가 작고 (2015. 9. 17)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치의학대학원에서 경조사를 카톡으로 보내오는데 정년 15년차인 저에게도 타교 출신 현직교수의 장인상까지 알려주니 고맙기도 하고 글쎄요. 교수(명예교수)에게 일괄적으로 메일을 발송하기 때문이라는데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이러한 결례는 하지 않겠지요. C교수는 서울대 교수요원 충원계획에 의거 1980. 3. 7일 구강미생물학 교실 조교수로 특채 되었는데 당시 김각균 교수는 서울대 의대 미생물학교실 박사과정에 입학하던 해였고(김각균 교수자료제공) 정년(2006. 2. 28)할 때까지 26년간 봉직하고 명예교수로 추대 되었습니다. C교수의 정년 축하연은 2006. 3. 8일 종로 한일관에서 했는데 이것은 “2006년부터 명예교수 축하연은 별도로 한다”라는 기획위원회 결의(학장 정필훈)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C교수는 같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자연대를 졸업해 저희 대학으로서는 타교 출신 제1호 교수 이었습니다. 전에는 대학에서 주관하는 축하연은 큰 호텔에서 했는데 C교수의 정년축하연부터 이렇게 하게 된 것이지요. 2018. 3. 1
봄, 꽃피는 소리. 여름, 구름에 비 맺히는 소리. 가을, 잎에 단풍 드는 소리. 겨울, 눈들이 낙하하며 수던거리는 소리도 좋지만 식구들이 덜커덕 하고 문 열며 귀가하는 소리도 참 좋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나면 이제 편히 숙면을 하게 됩니다. 우리 집은 아이들이 쉬어가는 집입니다. 딸아이 친구들 놀러와 방에서 수다 떨고, 큰 아들 친구들 방에서 게임하고, 막내아들 친구들 밤새 토하려 화장실 왔다 갔다 하면 이게 사람 사는 소리인 듯해 흐뭇하게 미소 짓곤 하였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당연히 자기들 방에 없지만 자꾸 애들 방을 쳐다보고 가끔은 그 방에 들어가 아이들 냄새를 맡아보곤 합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이 왠지 낯섭니다. 책이 떨어져 있고 갈아입은 옷이 흐트러진 채 있어야 정상인데 너무 깨끗한 방에서 그리움이 솟아오릅니다. 갑작스런 죽음을 접하고 나면 하루하루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지 새삼스레 느껴집니다. 어떤 이는 진료실에서 홀로 무언가를 정리하다 갑작스런 심정지로 세상을 떠났고 어떤 이는 등반하다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합니다. 두 분다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살고 있어 아무도 이렇게 갑작스런 이별을 할지는 몰랐겠지요. 삶이 이렇게 황망할 줄 알
얼마 전에 읽었던 책에서 본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다들 마음 쉴 곳이 필요하다고.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그 목적이 있을 텐데, 학생인 우리는 옆에 있는 서로를 또한 한 명의 사람으로 보고 있을까? 처음 이 길을 걷기 시작할 때 문득, 왜 이렇게 서로를 할퀴는지 궁금했었다. 왜 화를 내며 일을 가르쳐주려 할까, 모르면 알려주면 되는데 어째서 저렇게 서로에게 면박을 주려고 할까,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화를 낼 수 있는 걸까? 군대에서의 생활이 기시감 있게 떠올랐다. 그때엔 사람의 삶의 방식까지의 호기심은 없었는데, 사회에서도 반복되니 궁금해졌다. 나름 오랜 시간을 관찰해보니, 사람들은 어떤 구조나 관계에 익숙해졌을 때, 서로를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 어떤 관념 같은 존재로 고정시키려는 것 같다. 이 사람에게 친절하게, 그 사람이 기뻐할 수 있게, 감정의 공유나, 서로의 좋아지는 점을 목표하기보다 이 일을 해줄 사람, 이렇게 대해도 될 사람, 이런 사람. 어떤 의미로는 사람 간의 관계가 깊어지며, 정해지는 많은 거리와 선들일 수 있으나, 서로가 처음 본 남만도 못한 관계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본보기를 삼으려 하거나,
등산은 1등을 요구하지 않는다. 완등 그 자체가 목표다. 에베레스트산을 등정하면서 시간을 재거나 순위를 매기지 않는다. 등정 그 자체만으로 정직하고 세계적인 뉴스이며 자신에게는 금메달이다. 그래서 나는 1등이 없는 등산을 무척 즐기고 좋아한다. 이와 비슷한 스포츠가 있다. 마라톤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많은 선수들을 보면, 순위보다는 자신을 극복하면서 완주했던 기록 자체가 커다란 상인 것처럼 보인다. 등산이나 마라톤은 결국 경쟁자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비록 한 번도 마라톤을 뛰어본 적이 없지만 어떤 매력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 것 같다. 평창동계 올림픽… 짜릿하고 화려했던 축제가 막을 내렸다. 매체마다 모두들 친절하고 안전했던 성공적인 올림픽이라고 칭송하여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을 가진다. 다만 누가 금은동 3종의 색만을 만들어 선수들에게 영광을 주었는지는 다소 아쉽다. 모든 것을 실력으로 평가하는 것이니 만큼 여기에 이의제기를 한다기보다는 상을 받지 못한 많은 선수들에게는 자신을 극복했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쨌든 대한민국 짝짝짝. 그런데, 올림픽게임 후반기로 들면서 개최국 한국에 발생한 옥에 티는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스피드스케이팅
엄마가 밥을 짓고 있다. 미리 불려놓은 보리쌀을 가마솥 바닥에 안치고 그 위에 한줌도 안 되는 쌀을 얹혀 할아버지 몫을 더한다. 오늘 엄마는 가지나물을 할 모양이다. 텃밭에서 따온 가지 서너 개를 밥솥 안에 넣고 찐다. 난 가지나물이 싫다. 약간 물렁물렁한 식감이 그렇고 보랏빛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찐 가지의 거무티티한 모양새가 그랬다. 엄마는 찐 가지를 세로로 길게 찢어, 마늘, 파, 고춧가루를 간장과 들기름에 버무려 무쳐 가지나물을 만든다. 가지나물은 엄마의 주특기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문밖 텃밭에는 가지며 파며 고추며 마늘이 널려 있어 손쉽게 구할 수 있고, 돈도 안 드니 손쉬운 반찬거리 일게다. 아무리 간단하고 손쉬운 나물이지만 엄마의 손길은 항상 따듯하고 또글또글 하다. 엄마 돌아가신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동료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다. 밑반찬에 가지나물이 나왔다. 옛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그런 가지나물이 아니다. 가지를 깍두기처럼 썰어 찐 것도 아니고 레인지에 데워 온 가지나물이다. 한 친구가 말한다. “이제는 옛날에 엄마가 해 주시던 가지나물을 먹지 못할 거야.” “요새 부인들이 가지나물을 만들지도 않지만 만들 줄도 모른다고.” “옛날 엄
1508년. 그의 나이 33세. 세계 최고의 상업도시 피렌체에서 그는 자기보다 스물 셋이 많은 이미 당대 최고의 미술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성에 버금가는 업적을 이루고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시스티나 채플이라고 불리는 예배당의 궁륭형 천장에 그림을 그려 넣을 것을 제안한다. 사실 제안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이 예배당은 1481년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명을 받아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는 교황의 주문을 받지 않으려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다. 바로 4년 전 교황은 그를 로마에 초청하여 기독교 세계의 대왕에 상응하는 자신의 영묘를 세우게 했다. 조각가인 그를 매료시키기에 이 보다 더 야심찬 프로젝트는 없었다. 그는 당장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100km 떨어진 카라라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품질이 뛰어난 대리석 채석장으로 달려가 이 거대한 영묘를 장식할 대리석 석재들을 선별하는데 6개월을 보낸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와 작업에 착수하여 40여점 이상의 영묘 조각과 청동부조들로 교황의 무덤을 꾸밀 계획을 세웠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 신축공사에만 열을 올릴 뿐이었다. 그는 교황이 영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