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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100주년이다.

대한치과의사협회 기원 ‘갑론을박’ 특별 기고

2021년은 大韓齒科醫師協會 창립 100주년 기념일이 있는 해다. 협회 창립기념일은 1981년 대한치과의사협회(치협) 제30회 정기대의원총회에서 결정되었다. 기념일을 제정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세부적인 날짜는 집행위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날짜를 위임받은 집행위원회는 많은 논란을 거쳐 朝鮮齒科醫師會 창립일인 1921년 10월 2일을 기준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새삼스럽게 40년이 지난 지금 창립일에 대한 논란이 다시 시작되었다. 치협은 있어왔던 다양한 의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다시 공론화하였다고 한다. 힘을 집중해야 하는 이 중요한 시기에 똑같은 모양의 혼란스러운 바깥세상을 보는 것만 같아 아쉬운 마음이 있다. 이에 대해 연구가 많은 배광식 교수가 기념일에 관한 평론(2020. 12. 23)을 써서 겹치는 면이 있지만, 장외에서 보고 있던 한 명의 의견으로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조선치과의사회를 창립할 때 경성치과의사회의 역할, 한성치과의사회(1925년 6월 9일)의 창립과 경성치과의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광복 후 조선치과의사회(1945년 12월 9일) 창립과 이 후 대한치과의사회에서 대한치과의사협회까지의 과정이 작년 10월 30일과 올해 3월 4일 치협이 주관한 ‘협회 창립일에 관한 공청회’를 비롯하여, 그동안 발표된 자료들을 보면 심도 있게 연구되었고, 치열하게 논의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제는 논의로 결정되기 쉽지 않겠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투표로 결정될 사항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경성도 아니고 한성도 아닌 朝鮮의 이름으로, 또는 大韓의 이름으로 일본인(또는 미국인)에 의해서든, 한국인에 의해서든 이 땅에 齒醫學이 심어져 뿌리내리게 된 것이 언제부터냐 하는 것이다. 이 땅에 치의학이 심어진 후 한국인 치과의사가 성장하여 중심이 된 단체를 시초로 삼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다.


요즘 “소설 쓰시네.”라는 말이 널리 알려졌었는데, 1921년 조선치과의사회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은 부분 그들만의 생각대로 추측하는 부분이 많아 보였다. 필자도 소설을 하나 쓴다면 당시 일본 치과의사들이 일본치과의사협회의 조선지부라고 하지 않고, 조선치과의사회로 명명한 것은 일제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치과의사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자신들만의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창립총회를 할 때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성치과의사회의 도움마저 없이 별도의 기부금을 받아 개최했다고 하였다. 경성이란 한 지역에 만들어진 경성치과의사회에서 조선이라는 전국단위의 단체를 만드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있었을까?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단체를 만드는 것은 친목의 의미도 있겠지만,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에 의하면 총독부에서 입치사의 문제나 시험제도에 대하여 진정해도 “그것은 경성치과의사회 의견이지 전 조선의 목소리는 아니다.”라며 회피하기 일쑤여서 전 조선의 목소리가 되기 위하여서는 전 조선적인 기관을 만들어야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하였다. 또한 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도 조선의 치과의사들이 대동단결하여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조선치과의사회를 창립하였다고 했다. 반대 측은 이것을 조선치과의사회의 창립이 총독부의 행정적인 도움을 받기 위한 꼼수라고 했는데, 이것은 당연한 과정 아닌가? 당시 조선의 치의학 발전을 위하여 이보다 중요한 생각이 있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당시에도 매우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총독부의 지원도 받고, 치과의사회가 의사회와 대등하게 대우받게 된 것처럼 치과의사회의 활동을 공식화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백성들이 모두 어렵게 살 때 조선치과의사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완전히 결핍된 단체여서 우리의 뿌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시대에 어떤 것을 원하나? 솔직해져보자. 개인적인 활동을 제외하고 지금의 치협은 어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하고 있나? 이미 많은 토론이 있었으므로 짧은 지면에 여기에서 일일이 다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나?


100% 善은 없다. 100% 장점만 있는 政策도 없다. 서로 보는 시각에 따라 贊反이 나뉠 뿐이다. 서로가 주장하면 끝이 없다.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의 말 중에 “대개 세상사는 목숨을 걸고 열중할 때는 하고자 하는 일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이 글이 게재될 쯤이면 2021년 3월도 거의 다 지났을 것 같다. 한 해의 ¼이 지난 것이다. 시간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다고 하고, 지나간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21년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치과계에는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이 시기에 우리는 자원 봉사할 자리도 없었다. 봉사를 자원해도 찬밥이었다. 다행히 얼마 전 세종시에서 치과공중보건의를 선별진료소에서 봉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잘 하고 있다는데, 이제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이처럼 우리의 자리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치협의 창립기념일 문제는 우리의 생일을 찾는 문제이니 당연한 일로 생각되지만, 우리에게만 중요한 것 같다. 아니 몇 사람한테만 중요한 지도 모르겠다. 작년 “치열한 설전”이었다고 말하는 ‘치협 창립일에 관한 공청회’의 조회 수는 2020년 12월 19일 당시 423회이었고, 4개월이 지난 2021년 3월 15일 현재 451회였다. 참고로 창립기념일 공청회 너튜브 바로 위에 3개월 전에 올라와 있는 치협의 ‘치과 종사 인력 구인난 해결책 마련을 위한 공청회’는 704회이었다. 올해 3월에 열렸던 ‘창립일에 관한 공청회’는 6일이 지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119회이었다.


딱 40년 전 1981년 대의원총회에서 이미 결정된 일이다. 우리 선배들이 있어서 지금만큼이나마 대한치과의사협회가 이어져올 수 있었다고 본다. 선배들의 노력을 가볍게 말하지 말자. 올해가 100주년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