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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곡선

시론

한숨 돌릴 틈조차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때때로 옛것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랄 때 포대기에 싸여 엄마 등에 업혀 다녔던 흐릿한 기억, 구불구불한 산길을 거쳐 엄마 따라 시골 장에 갔던 기억, 비둘기호 열차가 고향 산비탈 저 너머로 천천히 지나갈 때면 낯선 이에게 무작정 손을 흔들었던 기억들이 지금도 뇌리에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 시절엔 교통수단이 없어서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녀서인지 시간개념도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요즘에 와서 하는 일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다가 잠시 멍하니 앉아있을 때면 불현듯 옛날이 그리워지곤 한다. 너무 빨리 변해가는 지금의 우리의 세상은 아차 하는 순간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컴퓨터와 휴대폰 등 현대의 문명 덕에 하루하루 변해가는 세상에 놀랄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편리하고 이로운 점도 많지만 자신도 모르게 기계의 노예가 되어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현재의 바쁜 삶을 털고 심신의 여유로움을 찾기 위해 가끔 공원이나 옛 궁궐을 거닐다보면 구성하는 것의 대다수가 둥글고 굽어서인지 여유가 있고 편안해진다. 성벽이나 성문, 궁전 추녀의 휘어진 선,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굵은 곡선, 궁궐 돌담길을 둘러보며 걷다보면 마음이 여유로워지고 익숙한 것들은 다 굵직하고 푸근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봉분이 여러 개 모여 있는 무덤가에서의 귀신이야기도 이젠 옛 추억으로 묻혀지고 있다. 하늘 높이 대열을 이루며 날고 있는 기러기나 물찬제비의 곡선을 그려보며 안락함과 신선함을 느낀다. 이러한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인에게 필요한 충전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해보면 과거와 현재는 곡선과 직선으로, 느린 것과 빠른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빨라서 좋긴 한데 한 편으로는 느리고 굽은 것을 좋아하는 게 우리들의 본심이 아닐까.

 

헬스장에서 러닝메이트를 최고속력으로 정해 놓은 상태로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리기는 정말 힘들다. 아니, 실제로 이십분쯤 달리고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같은 속력으로 야외나 강가를 달리는 건 훨씬 덜 힘들고 더 오래 달릴 수 있다. 일정한 속력으로 앞만 보고 달리면 쉽게 지치지만 땅을 밟으며 주변 자연물과 먼 경치를 보며 일직선이 아닌 중간중간 굽어진 길을 돌며 달리면 지루하지 않고 힘도 덜 들기 때문이다. 수시로 피부에 와 닿는 산들바람이 기운을 상승시켜 준다. 역시 굽어서 여유롭다.
 
빠른 물살의 계곡물도 거친 바위를 부수고 깎아 하류로 내려갈수록 느려지고 완만해진다. 큰 돌이 구르고 닳아 부드러운 돌과 모래로 바뀌는 자연을 보며 고운 백사장의 모래를 움켜쥐기도 하고 모래 탑을 쌓으며 동심 속으로 빠져든다. 눈이 쌓인 들판에 눈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大자로 누워 눈 자국을 찍으며 즐거워했던 어릴 적 시절도 떠오른다. 발자국을 따라 눈 속의 토끼를 쫓던 그 때 그 시절이 그립고 그립다. 이따금 혼자 강가를 걸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의 줄기가 저 멀리서 휘어가는 것을 보며 속도조절을 자연이 알아서 하는구나 라며 ‘천천히’ 가 참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빨리빨리’가 몸에 배어버린 우리사회, 몇 초를 못 참고 재촉하는 사람들, 빨리한다고 시간이 더 남아서 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쫓기면서 살아야 하나? 빨리하면 할수록 더 많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 시간이 있고 없고는 누구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할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그리고 너무 바빠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살아야 하나?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나 산이나 바닷가의 둘레길을 따라 힐링 하는 것, 집주위의 산책로나 신천 둔치길을 따라 걷는 일, 모두가 운동하며 스트레스를 발산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굽은 것을 따라가는 그리운 향수라고 생각해본다. 오리 떼가 지나간 일렁이는 물결 따라 작은 원이 점차 커다란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느긋해진다. 도로를 따라 쭈삣쭈삣 늘어선 전신주보다 바람에 일렁이는 풍성한 이팝나무가 친숙하다. 산책길 따라 주렁주렁 매달린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으며 열심히 걷고 달리며 굽어진 저 끝을 향한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눈에 익숙한 것을 가까이 하고 싶은, 바쁘지 않는 삶이 자꾸 그리워진다. 세상 모두가 직선과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직선만 보면 시간에 떠밀리고 긴장되지만 곡선을 상상하면 마음이 푸근하고 여유로워진다. 초가집 지붕 위의 둥그렇고 누런 박, 우리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주는 도자기와 항아리, 특히 엄마의 따뜻한 품과 손길이 더더욱 그립다. 굽은 것을 그리워하며 눈앞에 그려지는 그리운 곡선을 마음에 담아본다.

 


그리운 곡선

 

가뭇없이 사라졌다
보이지 않아도
향수에 젖어
곳곳에 잠겨드는 정다운 곡선

 

점점이 이어진 곡선
강물도 휘어가듯
그리움도
훠이훠이 느리게 그려진다

 

초가집과 고층 빌딩
곡선 그리고 직선의 오늘
높아지고 빨라져 보이지도 않아

 

한옥의 추녀 달 항아리의 선
굽은 것의 여유
엄마의 우윳빛 젖무덤
익숙하고 포근한 그리운 곡선

 

-이광렬(2021년 월간문학 6월호 신인작품상 수상작)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