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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로 살아가기

김여갑 칼럼

이제는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어졌다. 1986년에 현재 살고 있는 집에 이사 와서 아직까지 살고 있고, 앞으로도 이사 갈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집에 이사를 온 것도 박사학위를 받고 전임의가 된 후 어느 나라, 어떤 교수가 있는 곳으로 공부하러 가는 것이 좋을까 생각하면서 1983년에 이상철 교수님이 다녀오신 일본 오사카치대에 잠시 들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오사카 치대의 친구들이 일본의 경우 도쿄 올림픽이 끝난 후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면서 아마 한국도 비슷할 것이라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한 날짜가 1987년으로 서울올림픽 1년 전이었는데, 그때 기억이 나서 무리하게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아버지께 말도 좀 들었다. 미국 가는 데에도 돈이 많이 필요할 텐데 왜 무리하게 집을 바꾼다고 난리냐고. 요새는 모두가 아파트 시세에 눈에 불을 켜고 있지만 그 당시 필자의 부모님은 아파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셨고, 관심도 없으셨다. 그런데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올림픽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아파트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전화하셔서 너희 집 바꾸기 잘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8천만 원도 안하던 것이 지금은 낡은 아파트가 되었지만 20억을 훌쩍 넘었다. 대학 교수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다. 물론 처음 살던 아파트도 재건축되어 올해는 완공될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우리 아파트보다 훨씬 비싸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간이 지나면 다 오르긴 하는 것 같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재건축 이야기가 있어 왔지만 언제 될지 모르겠다. 조합장 선거를 몇 번이나 하고, “희망을 가졌다, 실망했다.”를 반복했고, 아직도 반복하고 있지만 아마도 내 생전에는 어려울 것 같고, 기대감도 없어졌다. 나도 투표를 해서 정권을 세우는데 일조했고, 몇 퍼센트의 국민밖에 내지 않는다는 세금도 늦게 내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꼬박꼬박 냈는데, 우리는 항상 그들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한다. 그들은 정권을 잡기 전에 세금을 제대로 내 본 일이 있기나 한지 궁금한 때가 있다. 돈 쓰는 것을 보면 돈을 벌어 본 것 같지 않아서다. 벌어봤다면 국민이 낸 세금을 선심 쓰듯 그렇게 허투로 쓸 수는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들고 일어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옛날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일반 서민들이 강남의 어느 아파트값이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내 집 사기는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인터뷰 방송도 했다. 필자도 당시 맘대로 볼 수도 없었던 바로 그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를 보러간다고 아내들끼리 약속해 놓은 것을 난 지금 살고 있는 여기가 좋다고 안 간다고 버텼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격이 급등하는 것을 보고 후회한 적도 있다. 요즘 다시 내렸다고는 하지만 이젠 가고 싶어도 못 간다. 여전히 격차가 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준에 맞춰서 살면 되는데, 모두가 대학에 가야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모두가 강남을 쳐다보고 있다면 답답하지만 해결책은 없다고 본다. 사실 대학도 마찬가지로 입학지원자 수가 줄어서 어떤 대학이든 대학은 갈 수는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가기위해서 더 열심히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던지 해야 하지 않나?


처음에 살던 아파트의 경우 낭만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단지 내에 작은 동산에서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포대자루로 미끄럼 타던 둔촌동의 어느 아파트를 지날 때면 고향집이라고 불렀다. 이제는 둘 다 마흔 살이 넘어서 그런 말은 안 하지만. 우리는 선택의 자유는 있지만 획득하기 위하여서는 경쟁이 필요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요구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경제적으로든, 학문적으로든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진실이기도 하고, 현실이다.


필자가 학장을 할 때 20년 전의 일이다. 북경치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같이 갔던 교무위원들이 자유 시간을 가질 때 북경치대를 가보고 싶다고 요청하여 가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필자가 북경을 다섯 차례 갔었지만 아직 만리장성을 못 봤다. 북경치대에 도착했더니 국제담당 여직원이 병원을 안내하였다. 중국이 개방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인데, 치대병원의 구성을 보고 놀랐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① 각각의 진료과로 나누어진 진료부가 있었고, ②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교수진으로 구성된 one stop 진료부가 별도로 있었고, ③ 개인치과처럼 다수의 일반 치과의사가 진료하는 일반진료부를 포함하여 진료부가 세 파트로 구분되어 있었다. 환자의 경제 수준에 맞추어 선택하여 진료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가능할까? 우리는 구분되는 것을 못 견디어 한다. 모두 똑같은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받을 치료 수준(?)이 경제 수준으로 나누어진다면 아마도 참지 못할 것이다. 이 같은 제도에 환자들의 불만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환자들은 만족한다고 하였다. 마침 북경치대 학장도 구강악안면외과학 전공이어서 보다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이때 만남을 계기로 이후 국, 내외 학회에서 몇 차례 만나 반갑게 인사할 기회도 있었다. 


일반 개인치과병원도 갔었다. 필자가 있던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친 조선족 치과의사가 취직하고 있는 치과병원으로 그곳의 치과의사는 모두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하였다. 환자들도 거리에서 보았던 중국인들과는 한 눈에 봐도 달라보였다. 모두 갖추어 입은 사람들로 여유가 있어보였다. 원장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여선생이었다. 이 조선족 제자도 우리나라에서 공부한 것을 인정받아 취직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공산주의 국가라서 강제적으로 이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것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인의 의사와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개인을 중시한다면서도 요구하는 것이 많고, 범위 내이기는 하지만 병원을 한껏 치장해놓고 받고 싶은 대로 치료비를 받으면서도 공급자(병, 의원)나 수혜자(환자)나 모두 공개적으로 차별화 되는 것, 구분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새해에는 여러 방면에서 모두 자기 분수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