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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협회원 실추된 의권 찾아야”
은퇴하는 김인철 치협 고문

5월 25일경 金仁哲(김인철·74세) 치협 고문이 현직에서 물러난다. 57년부터 76년까지 19년 동안 서울치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76년부터 78년까지는 치협회장을 지내고 곧바로 경희치대 학장으로 부임, 3번 연임하며 치대를 경희대 간판 대학으로 부상시켰다. 그리고 84년부터 시작한 개원. 이제 16년째 개원의로 살고 있는 그가 아직도 청년못지 않는 건강을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미련없이 현직을 벗어 던졌다. 이에 치과계의 한 획을 그어 왔던 金 고문의 삶을 살펴보고자 은퇴 10여일을 앞두고 지난 14일 인터뷰를 했다. <편집자 주>
건강할 때 병원 문 닫는 것이 “미덕” 새마을 진료·설탕덜먹기 운동 생생 호 탕하면서 괄괄한 성격, 고희를 훨씬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년같은 기백이 살아있는 사람, 金仁哲(김인철) 치협 고문. 金 고문을 처음 본 이들은 이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캐릭터는 강하면서도 매우 정돈되어 있다. 아직도 젊다는 인상을 줄 만큼 金 고문은 매우 정정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가 25일을 전후로 은퇴한다. 다소 의아스럽다. 이런 의문에 대해 그는 단호하다.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하지. 과거 남들이 다 부러워 하는 서울치대 교수자리를 떠날 때도 그랬고 치협 회장 자리를 단임하겠다고 장담할 때도 그랬으며 경희치대 학장자리를 떠날 때도 미련없이 떠났어. 마찬가지로 건강할 때 치과의원을 그만 두는 것이 좋아. 과욕 부릴 필요는 없어." 그는 김동순·신민철 전 치협회장이나 김춘근 전 서울치대동창회 회장 등처럼 작고하실 때까지 진료실을 지키는 일에 대해 회의적이다. “일에 대해 미련을 안가지는 것이 건강유지의 비결이지." 金 고문은 4.19부터 5.16구테타, 6.3사태를 관통하던 시기에 서울치대 학생과장으로 재직했었다. 당시 6.3 학생데모가 극심해 지자 서울대 학생과장회의에서 데모를 말리자는 의견이 팽배해 ‘나는 제지하지 않겠다"며 사표를 낸 적이 있다는 그에게 그만의 기백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시 학생회장을 지내 남다른 인연으로 엮인 제자들 가운데는 이미 치과계의 주요 인사로 자리잡은 이들이 상당수 있다. 현 李起澤(이기택) 협회장이 그렇고, 尹興烈(윤흥렬) 고문, 張英一(장영일) 서울치대 교수도 그렇다. “특히 李 협회장과는 남다른 경험도 했지. 李 협회장이 학생회장하던 당시 파월국군위문단으로 L.S.T를 함께 타고 퀴논에 도착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그때가 월맹군의 구정공세를 피던 때라 열흘간 갇혀 있었지.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해." 金 고문은 李 협회장에 대해 일처리가 시원시원 잘 하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치과계 의권 신장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고 보인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金 고문은 구강보건과 부활 때 李 협회장에게 현재 제주지사로 있는 우근민 전 총무처 차관을 연결해 준 숨은 공로자였다. “우 지사는 나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어. 우 지사 덕분에 구강보건과가 부활될 수 있었지." 그 가 치과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지난 74년 서울치대 재직시 개원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공직지부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76년 19년간의 교수직을 미련없이 물러나면서 맡은 협회장 시절에는 당시 尹興烈(윤흥렬) 공보이사의 제안으로 설탕 덜 먹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 운동은 사상 최초로 54만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던 주부클럽(회장 정광모)과 연계하여 전국 순회 계몽활동을 하는 등 대국민 홍보효과를 끌어 올렸다. 또한 협회회관 1층에 새마을 진료원을 개원하여 서울지부 회원들이 번갈아 가며 무료진료를 펼쳤던 일은 그 당시 한국일보 등에 소개되어 사회적 관심을 얻었었다. “당시 덴탈 패밀리들이 합심하여 동원됐어. 예상외로 잘 돼 갔었지. 봉사자들도 스스로 즐거워하고 보람있어 했지." 그 리고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군사정권 시절에는 해외여행 가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여러 채널을 통해 77년에 어렵사리 대표단 6명을 데리고 마닐라서 열리는 아태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아태연맹 회원국들은 주로 영연방국가들이어서 회의를 영어로만 하자 金 고문이 일본과 한국이 비영어권임을 내세워 통역을 붙여줄 것을 요청, 일어 통역사를 마련한 적이 있었다. 또 회의자리도 한국이 맨 끝자리에 배치되자 이의를 제기, 알파벳 순서로 배치하게 하는 등 주권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리고 여기서 金 고문은 제4 부회장에 당선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말이 많은 의료보험 시작도 그가 협회장으로 있던 77년에 일어났다. “당시 시기상조라고 반대했지. 전국 생활보호대상자가 2만5천여명이니까 각 시도 보건소에서 정부사업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어. 그러나 역부족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