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대 제적 → 투옥 → 노동현장 시련 → 장관되기까지
“온몸 던져 살았지요”
석방되던날 재수감… 울던 어머니 눈에 밟혀
위장취업 들통나 쫓겨나던 순간 아직 생생
치과 개원땐 떼강도 … 큰일없어 다행
“나는 치과의사, 정치 잘해 보답할 터”
金榮煥(김영환) 과학기술부 장관. 치과의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장관의 중책을 맡아 활동한지가 지난 3일로 100일 째를 맞았다.
73년 연세치대를 입학해 15년만에 치대졸업장을 손에 쥘수 있었던 金 장관. 치대 입학 후 지난 96년 국회의원에 당선되기까지 20여년 젊은날의 세월은 질곡의 삶 그 자체였다.
유신시절 긴급 조치 9호로 2년여간의 감옥생활. 그후 출옥…. 전기기술자 자격증을 가지고 위장취업해 현장노동자로서의 고달픈 삶 속에서도 時心을 지피던 열정, 노동 현장에서 만나 결혼한 지금의 아내와의 결혼생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성공하기까지 그의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많이 기다렸지요 중요한 연수회가 있었습니다.” 30분 정도 인터뷰 시간이 늦어 미안하다고 먼저 인사를 건넨 金 장관은 1년 전 국회의원회관에서 본지 두 번째 만남이었다. 장관이 된 지금 조금은 거만해질 수도 있으련만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남형 얼굴이 바쁜 일정 탓인지 예전보다 상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金장관은 자신의 인생이 기복이 많았던 것은 온몸을 던져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고 했다.
金 장관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 자신이 처참하게 무너져 나약해지는 순간을 여러 번 느낀 적이 있다고 했다.
그 중 몇 가지 사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감옥에 있던 시절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정치범인 만큼, 양심수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 자기위안을 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홍성 교도소에 수감돼 1년형을 다 살고 출감하는 날 아침 그는 재 수감되는 비운을 맞았다.
“출소자들이 나갈 때 새벽 6시면 열리던 교도소 문이 열리지 않았어요 7시가 되어도 8시가 되어도…. 그래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요.”
10시가 넘어서야 문이 열렸다. 그러나 교도관의 말은 검찰청에서 다시 부른다는 것이었다.
검찰에서는 1형은 다 살았지만 교도소 안에서 유신철폐를 주장한 혐의로 추가 기소하겠다고 했다. 그 자리에는 오매불망 아들의 출감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두눈이 밤송이처럼 부은 채 울고 있었다.
“출소한다는 설렘과 기쁨에 들떠 있다가 다시 갇히는 일은 정말 끔직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은 역시 사람에 대한 그리움... 주체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어떻게 참느냐는 것이었지요.”
검찰에 추가 기소돼 영등포 구치소로 이감되던 날, 열 댓명의 죄수들은 포승줄에 굴비엮듯이 엮겨 열차에 올랐고, 서울근교에 도착해 전철로 갈아탄 순간 시민들과 얼굴이 마주치게 됐다. 이쪽 저쪽에서 혀를 차며 쳐다보는 시민들. 양심수라는 자부심을 갖고 시민들을 향해 “뭘봐” 하고 소리도 쳐봤다. 그러나 너무나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치대를 15년만에 졸업 후 병원을 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떼강도를 만난 적이 있었지요.”
죽느냐 사는냐 하는 절박한 순간이었다. 단 몇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고통스러운 그 순간은 어떤 사건보다도 충격적이었다. 10여명에 가까운 강도는 스타킹으로 위생사와 金장관, 진료를 받고 있던 어여쁜 여자 환자를 꽁꽁 묶고 협박에다 구타까지 했다.
그 순간 金 장관은 돈걱정이나 자신의 안위보다 여자환자와 위생사의 몸에 혹시 손이라도 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金 장관은 통장을 떼강도들에게 바치면서 폭력 앞에 그저 무력한 인간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세 사건에서 金 장관은 지울 수 없는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金장관은 시를 좋아한다. 시인이기 때문이다. 감방 안에서도 가느다란 못으로 벽면에 시를 썼다. 다른 교도소로 옮겨가는 심정을 시로 남겨 감방 안 벽면을 채워 나갔다.
지난 86년 문학계간지 ‘시인’과 ‘문학시대’를 통해 정식으로 문단데뷔를 했다. 그후 ‘꽃과 운명’, ‘지난날 꿈이 나를 밀어 간다’ 등 다수의 시집을 발표했으며 최근엔 동시집 ‘똥먹는 아빠’를 출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79년 출소 후 金 장관은 전기기술자로 노동현장에 뛰어든다. 거기서 지금의 부인이 된 한 여성을 만난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후 불어닥친 학원 민주화운동 때 S여대 학생회 부활추진위원장을 맡았던 그녀였다. 그녀 역시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된 바 있었고 그후 여성노동자로 노동운동을 했다.
지난 85년 결혼식을 올렸으며, 평생 뜻을 합쳐 동지적 관계로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