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6번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15년전이 넘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내 마음을 지배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시절 내게는 모든 학생으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던 국어선생님이 계셨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의 주인공인 ‘로빈윌리암스’와 감히 비교할 수 있었던 현실의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어느날인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너희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게 무엇인지 아니?”
한참때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귀신, 바퀴벌레, 엄마, 시험, 여자, 강도, 국회의원, 무식한 거요~~”
로빈윌리엄스 같은 선생님이 조용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건 익숙해지는 거란다.”
아니 귀신이나 무장강도보다 무서운게 고작 익숙해지는 거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선생님은 부연설명을 해 주셨지만 당시의 나는 그 말씀을 확실히 이해를 할 수 없었고 언젠가 이해를 할 거라는 선생님의 말씀만을 믿기로 했다. 나는 좋은 말은 수첩에 적어두고 곱씹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수첩에 잘 적어두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익숙해 지는 것이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 선생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조금씩 내 마음속에서 어렴풋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나는 이제야 조금씩 이 문장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예전에 가슴뛰던 일들도, 불끈불끈 화내던 일들도, 이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일상으로 들리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익숙함의 본질이 아닐까?
‘정치인은 자신의 거짓말에 익숙하게 되고, 당선되기 위한 공약을 내세우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사기꾼은 비열함에 익숙해지고, 건달은 폭력이 자연스러워진다.’
‘치과의사는 환자의 통증에 무뎌지고, 치과의사의 가족들은 커지는 씀씀이에 익숙해진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빈도가 잦아지고, 새로운 결심은 점점 만들지 않게 된다.’
‘불의를 보고 지나치는 것에 익숙해지고, 사회의 부조리함도 저항없이 쉽게 받아들인다.’
‘걷는 것보다는 택시 타는 것에 익숙해지고, 늘어나는 뱃살을 내몸처럼 느끼기 시작한다.’
‘현실의 바쁨을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이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하는 사고나 행동 하나하나가 익숙함이라는 동물에 먹이를 주게 되는 것 같다. 애완동물처럼 처음에는 내가 선택하고 나를 좇아다니던 작은 익숙함은 내가 먹이를 계속 줄수록 계속 커져 어느날 문득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거구의 괴물이 된다. 익숙함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인 이유는 협박과 공포대신 편안함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우리를 조절하기 때문이다. 편안함을 내세워 마치 우리의 친구인것처럼 삶에 조용히 끼어들어, 어느 순간에는 거꾸로 주인도 모르게 주인행세를 하며 사고나 행동을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익숙함이라는 괴물이 주는 편안함에 만족하며, 아직도 우리가 주인인줄 알고 타성에 젖은 행동과 사고를 저항없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익숙함이라는 괴물에게 먹이를 계속 주면서 우리가 아직도 주인이라고 자부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글의 마지막에 나의 수첩의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진부한 문장이 떠오른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옥용주
강남차병원 양악수술클리닉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