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가 된지 10년이 되면서 치과의사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러 봉사 단체에서 봉사하던 기억, 경찰서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자문위원, 북부지방법원 자문위원 등의 지역사회에서의 활동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의 추억 등을 말이다. 항상 사람들을 만나면 치과의사이기 때문에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이 사실이다. 사회 속에서 치과의사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더 나아가 존경받기 위해 실행해야 할 덕목들을 고 최병기 박사님의 철학에 기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사회 속에 존재하는 치과의사가 되었으면 한다> 여러 분야에서 같이 어울려 활동하고 생활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에서 보았듯이 의료인으로서의 어려운 점 등을 서로 공유하면서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병원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지역사회에서도 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 지역 자체가 잘 될 수 있도록 작은 역할이나마 하게 된다면 더 나은 지역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의사와 법조인들은 사회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명감을 갖는 제일 윤리적인 집단이어야 한다>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게 하는 선인락과(善因樂果
치과의사로서 나는 행복한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그다지 능숙치 못하다. 우리의 마음은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기에, 다소 인위적인 성찰 없이는 그 내면의 상태를 명쾌하게 규명하기 어렵다. 이때 우리는 철학이라는 소중한 수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 각자가 원인 모를 불행과 우울을 해석하도록 도와주고, 그 해석에 기반하여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속의 수많은 철학자들 중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몰두했던 분으로서 나는 주저없이 에피쿠로스를 꼽는다. 쾌락주의라는 사조를 열었던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의미를 “쾌락을 느끼는 것”으로 정의할 정도로 만족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힘썼다. 기존의 철학자들이 정신적인 것에 몰두하느라 금욕을 강조했던 것과 다르게 에피쿠로스는 감각적인 쾌락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쾌락이 행복한 삶의 시작이자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쾌락 그 자체를 추구했던 에피쿠로스는 실제로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을까? 결코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삶은 일반인의 관점에서 금욕주의자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클래식이라면 장르나 연주자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게 들어왔다. 유명한 녹음들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생소한 작곡가와 연주가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연주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이른바 오직 ‘명반’에 집착하며 지적인 이기주의에 근거한 배타적 감상은 음악을 향유하는 진정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나아가 유튜브에 나오는 무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 몇 곡’ 따위의 하찮은 콘텐츠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겠다. 음악에 대한 예민함 때문인지 클래식뿐만 아니라 종합예술이라는 영화를 볼 때에도 배경음악에 크게 반응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유도 동기(Leitmotiv)라 하여 특정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주제 선율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켰다. 영화음악 속에도 ‘테마’가 숨어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무의식중에 인물의 감정 변화나 상황의 긴장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내 경우 클래식이나 영화에 대한 감수성은 서로 자극 받으며 확장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인지 영화 또한 지금도 매해 극장에서 300편 넘게 개봉작과 재개봉작 가리지 않고 관람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처음엔 베토벤으로 시작해 모차르트, 슈베르트, 차이
어려서부터 혼자 사유하는 시간을 즐겼는지 음악, 독서, 영화, 악기, 글쓰기 같은 방면에 자연스럽게 끌렸는데 특히 음악을 섬세하게 느끼는 편이었다. 궁금한 정보는 책, 잡지, 신문 등을 찾아 되는 대로 기록하고 모았다. 작곡가, 지휘자, 연주자, 감독, 배우는 물론 문학 속 인물들까지 나만의 방식으로 탐구했고, 척박한 가세 속에서도 책과 음반을 손에 넣기 위해 스스로 애썼다. 성인이 돼 삶의 템포는 정신없이 빨라졌지만 정적인 취향은 은은하게 이어져 나의 세계는 또렷한 형상을 갖춰갔으며, 덕분에 사람들과의 물리적 거리가 극도로 멀어졌던 팬데믹 시기에 자신과는 더욱 가까워지는 전화위복의 시간을 보냈다. 이제 지면을 통해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초등학교 4학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1962년 녹음을 담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성음 라이선스 테이프가 생긴 것이 ‘클래식’이라는 서양 고전 음악과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다. 작은 JVC 오디오로 67분짜리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 들었고, 무한한 감동의 ‘환희의 송가’ 선율이 4악장 한참 후 나온다는 점과 1~3악장의 존재는 아주 신기하게 다가왔다. 9번 교향곡에 문자 그대로 압도당한 후 이
치과대학을 다닐 때 내가 상상한 미래는 여느 치과의사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개원의가 돼 진료실에서 환자의 건강한 구강을 되찾아주는 역할에 집중하는 것. 지금처럼 일본 치과의사들에게 내 경험과 노하우를 전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어느 순간 나는 의사를 가르치는 의사가 됐다. 주 4일 진료하면서 한국·일본·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의사들을 가르치고 틈틈이 일본으로 협진을 하러 간다. 나리타 공항에 내릴 때마다 교수님들께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릴 때면 이게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지 깨닫곤 한다. 1980~90년대, 한국 치과의사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기술을 배우던 시절의 이야기. 당시 일본에서 선진기술을 배워 오는 것은 일종의 자부심이었다고 한다. 30년이 지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선배들이 배우러 일본으로 갔다면, 이제는 일본에서 나의 진료 경험을 원한다. 선배들의 노력과 한국 치과의 성장이 만들어준 기회가 내게 온 것이다. 나를 초청한 원장님들은 내가 메인 강사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우리병원과 같은 진료를 하는 분들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원격으로 증례 상담을 요청하고 케이스를 공유한다. 함께 치료 계획을 세우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불안한
필자는 후진국에서 태어나 중진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선진 한국에서 살고 있다. 한글, K-의류, K-팝송, K-뷰티, K-식품, K-문화, K-방산, K-메디칼 등 한국의 사회·문화·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세계인들이 한국을 흉내내고 체험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연스레 스며든 선진 한국에 자부심을 느낀다. 2016년 “의료 해외진출 및 외국인환자 유치 지원에 관한 법률”(약칭 ‘의료해외진출법’) 제정에 관여하면서 정부의 해외환자유치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같은 해 법령에 따라 ‘의료통역사 능력검정시험’이 시행되었고, 당연히 10년째 의료통역사검정시험위원장으로서도 ’영중일러아몽베‘라는 필요했던 의료통역사를 매년 양성하고 있으며, 최근 태국인 환자의 급격한 증가추세로 2026년부터는 통역사 시험에 태국어를 추가로 실시할 예정이다. 2009년에 보건복지부에서는 본격적으로 해외의료진출에 대한 행정과 제도적 준비를 시작하면서 의료계에 처음으로 해외환자유치를 허용했었는데 당해 6만 여명의 해외환자가 다녀갔었다. 이후 국내에 지속된 해외환자의 증가로 의료해외진출법의 태동 이유가 되었던 것인데, 우리 치과계는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이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 성적이 잘 나올 줄 알았다.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스터디 플래너 속 계획들을 볼펜으로 그어가며 흔히 ‘순공시간’이라고 하는 숫자로 하루의 만족도를 평가했다. 성취의 기쁨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하루하루가 결과를 향한 조급함 속에 있었고,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수록 나 자신에게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스트레스와 걱정의 연속이었지만,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치과대학 입학식에 참석한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입학 후의 나는 또 다른 긴 여정을 앞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환자의 구강 건강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 위한 여정이었다. 본과 진급 전, 모두가 잠시 쉬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시기에도 나는 여전히 고등학교 시절의 습관을 놓지 못했다. 새내기였지만 마음의 여유는 없었고, 오랜 완벽주의가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완벽히 해낸 것도 아니었고, 언제나 잡히지 않는 목표처럼 느껴졌다. 나는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오히려 지쳐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 소중한 시기를 조금 더 즐기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치과대학 생활은 언제나 잔잔하게 바쁘다. 실습, 강의, PBCL,
저는 의료정보학을 전공한 치과의사이자 변호사로, 현재는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회사에서 일하며 자회사에서는 바이오텍과 메드텍 스타트업 투자를 겸하고 있습니다. 최근 초등학생 딸이 진로탐색 관련 학교 숙제로 “아빠는 직업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잠시 머뭇거렸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면, 제 정체성의 중심에는 여전히 ‘치과의사’라는 이름이 가장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제 일상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로 가득합니다. ‘치과의사/변호사’라고 적힌 명함을 주고받고 나면 어김없이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치과의사를 그만두셨어요?” 하도 자주 받아서, 명함 한쪽에 간략한 설명을 인쇄해둘까 농담처럼 생각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만큼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뚜렷하고, 쉽게 다른 일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진 직업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의아함의 밑바탕에는 결국 “치과의사는 편하게 돈 잘 번다”라는 통념이 깔려 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는 제 아내,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외삼촌, 멀리는 지난달 제가 스케일링을 받은 송도 사무실 건물의 치과 원장님까지... 각양각색의 진료실을 지켜본 제 결론은 명확합니다. 치과의사는 결코 ‘편하게 돈 잘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