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재 의 <대한치과의사협회 협회사편찬위원장>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의 참여 여부와 정체성
지난 9일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위원장 신재의)와 대한치과의사학회(회장 배광식)가 합동회의를 열어 치협 창립기념일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관련기사 2010년 12월 23일자 26면 참조>. 특히 이날 합동회의에서는 지난 1921년 설립된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는지 여부와 함께 회의 정체성이 주요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 같은 논의와 관련 신재의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 위원장과 변영남 대한치과의사학회 명예회장이 각자의 주장을 담은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와 게재한다.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에 한국인 치과의사 참석 여부는 조선치과의사회가 한국인 치과의사회가 될 수 있느냐라는 문제로 뜨거운 감자 중의 하나이다.
어려운 일이다. 선학(先學)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선학의 글이 사회적 파장이 크고 잘못된 방향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 때는 반론을 제기하여 보다 개선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면 후학(後學)은 이 일을 아니 할 수 없다.
기창덕(奇昌德) 선생님은 좋은 저서를 저술하여 후학에 귀감이 된 분이다. 『증보 한국치과의학사』(1995)를 편찬하여 많은 부분에 참고가 되어 후학의 연구에 길잡이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사실에 대하여 소견을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에 따른 것이다.
경성치과의사회(京城齒科醫師會)에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가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한국 내에 치과의사 모임인 치과의사회가 창립되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 후 한국인 치과의사 함석태(咸錫泰)도 이 회에 가입하여 동참한 것으로 되어 있고,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는 대량 내도(來倒)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는 불과 수명에 지나지 않지만, 1925년 한성치과의사회가 창립될 때까지는 한국인 치과의사들도 이 회에 입회하여 동참했다고 알고 있다.”1)
1912년 1월 16일은 경성치과의사회 설립한 시기였다.2) 이 경성치과의사회의 회원인 일본인 치과의사와 함석태가 교류한 사실은 밝혀졌다.3) 그러나 경성치과의사회 회원인 일본인 치과의사와 교류하였다고 해서 경성치과의사회에 가입했다고 볼 수는 없다. 가능성은 있지만 확증은 없다. 또한 함석태 이외에 다른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경우도 같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증거가 되는 주석이 없이 가능성만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의 설립 초기에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참석 여부이다.
“경성치과의사회에서 발기한 전선치과의사회(全鮮齒科醫師會) 창립총회가 1921년 10월 2일 하세가와죠오(長谷川町) 은행집회소에서 오전 8시부터 개최되었다. 경성치과의사회의 회장과 창립위원, 전선 각도 대표자 등 23명이 출석하였고(중략) 당시의 조직은 각도의 치과의사회를 규합한 것이 아니고 개인적 참여에 의한 전선의 치과의사 모임인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였다.”4)
1921년 10월 2일 경성치과의사회 일본인 치과의사가 중심이 되어 조선치과의사회(朝鮮齒科醫師會)를 설립하였다. 경성치과의사회의 나라자끼 도오요오(楢崎東陽)가 설립위원장이었고, 도내가와 세이지로오(利根川淸治郞)·오오자와 기세이(大澤義誠)·미쓰다 소오(滿田操) 등이 위원이 되어 조선치과의사회를 설립하였다.5) 이 때 서울에서 참석한 치과의사는 11명이었고,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전국에 19명이었다.6) 현재 남아 있는 사진에 의하면 3명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 3명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있으리라는 가정 아래에서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다는 것은 커다란 무리이다. 또한 사진에 참여하지 않은 치과의사가 있을 수 있다는 가정만으로 조선치과의사회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참여했다는 것은 더 커다란 무리이다.
1925년 4월 15일 경성치과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 나온 후,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가 조직되었다. 회원은 7명으로 회장에는 한국 최초의 치과의사인 함석태가 추대되었고, 총무에는 경성치과의학교 제1회로 졸업한 안종서를 선임하였다. 회원 김용진·최영식·박준영은 경성치과의학교 제1회 졸업생이었고, 조동흠은 1925년 오오사까(大板)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었고, 김연권은 1923년 5월 16일 치과의사시험에 합격하였다.7) 한국인만의 한성치과의사회 조직은 참으로 우리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앞의 기록과 같이 한국인이 조선치과의사회에 가입했으리라는 가설을 만들어 조선치과의사회를 대한치과의사협회 기원으로 삼는 일은 해서는 안 될 것이다.
1)기창덕, 『증보 한국치과의학사』(1995), 366쪽.
2)大澤義誠,「조선치과변천 이야기」,『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79쪽.
『滿鮮之齒界』, 5권 12호, 1936. 29쪽.
3)동아일보 1924 2월 11일자
4)기창덕, 『증보 한국치과의학사』(1995), 366쪽.
5)楢崎東陽,「한국치과의계의 추억」,『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1, 1960. 75쪽.
6)『滿鮮之齒界』, 5권 9호, 1936. 10쪽.
서울의 大澤義誠, 柳樂達見, 生田信保, 利根川淸治郞, 外圭三, 滿田操, 佐野捨吉, 廣瀨文質, 堤○○, 御·政二, 三科○○, 지방의 치과의사로서 부산의 高橋貞一, 別府禮吉, 能野種冬, 櫛橋源太郞, 경남 통영의 河內一宗, 평양의 藤井康基, 竹下○○, 마산의 野村親俊 등이 참석하였다.
7) 안종서, 「우리나라 치의학계의 今昔談」, 『대한치과의학사연구회지』, 1960. 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