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시선
임철중 칼럼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
천년의 사랑
방콕 동북방 해발 800m에 위치한 Sir James C.C.의 1월은, 아직은 반소매 차림이 어울리는 한국의 초가을 날씨다. 아기자기한 27홀 코스에서 매일 36홀 골프에, 5성급 호텔비와 환상적인 세끼 식사와 맥주 몇 잔과 맛사지까지 몽땅 하루 20만원이 채 안 드는 최상의 휴양지. 햇수로 3년을 벼른 여행은 만족스러웠지만 역시 몸은 전 같지 않아, 아쉽게도 36홀은 하루건너 한번으로 줄였다. 오래 만에 덤으로 얻은 세 번의 오후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경비가 국내의 1/3도 안되니 한 달 넘어 머무는 부부도 많다는데, 이들이 읽고 남긴 책을 모아 둔 작은 도서실이 있어, 전부터 찜 했던 책 몇 권을 골랐다. 김훈의 ‘칼의 노래",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 이주향의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등. 어차피 선택은 한정된 ‘소장목록"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정작 가지고 간 ‘정의: Justice"는 백 쪽을 못 넘겼다.
‘천년"은 몇 년 전 사두고도 못 읽은 책인데, 말로만 듣던 이주향 교수의 ‘나는 길들여" 에 이 소설에 대한 에세이가 들어 있어 함께 뽑았다. 이 교수의 지적성취나 이념적 성향은 전북대 강준만 교수나 ‘창녀론(1996)"을 쓴 김완섭 씨에 비유된다.
먼저 “길들여지지 않음"에 대하여 살핀다. 섹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또는 오드리 헵번의 흘러간 명화 ‘the Untamed"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 같다. 야생(Feral or Wild)의 반대말이 길들임(Tame)이니까, 이 제목은 나는 “야성을 잃지 않겠다" 또는 “의지를 꺾이지 않겠다"는 다짐, 즉 여성으로서나 문화사상 학자로서 ‘저항정신"을 덕목 1호로 지켜가겠다는 말로 이해된다. 다음으로 “양귀자와 신경숙이 뜨는 이유"에서는 양귀자의 ‘천년"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Best seller 즉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저급하다는 판단은 일리 있을 수 있지만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라는 서두부터가 ‘꼬였다" 인기는 곧 저질을 의미한다는 부정적인 사고에 치우쳐있다. 이어 “90년대라는 상황에서 제목으로 시선을 끌고 문장력으로 버티긴 했어도 ‘천년"은 좋은 소설이 아니다. 남성중심사회 이데올로기인 신데렐라 동화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역사도 민족도 공동체도 없이 그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속물적 이기주의의 변형이라면?" 까지 나갔다.
‘남성중심 이데올로기"라는 용어에서부터 ‘이분법적 사고"의 냄새가 난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소설도 순수문학에서 사회(고발)와 역사, 오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가 있다. 사회소설만 해도 앙가주망의 심도에 따라, 무수한 고전(古典)에서 보는 사회풍자로부터 20세기 초중반 참여 내지 격렬한 동반 작가의 작품이 있다.
개입의 정도가 간접광고(PPL) 수준이라면 문학(소설)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만, 선을 넘으면 그것은 고발과 이데올로기의 홍보(PR)물 내지 선전선동문(Propaganda)이 아닐 수 없다. 문학작품으로 인정하더라도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벽서(僻書) 또는 특수 서클의 학습서에 불과할 것이다. 양귀자 ‘신경숙에게 이데올로기 빈곤을 꾸짖음은 김연아에게 100m 신기록을 요구하는 격이 아닐까? 아 다르고 어 다르듯 “베스트셀러 중에도 저급한 것이 많다"는 모르되, “베스트셀러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는 표현은 곤란하다. 소설이란 먼저 많이 읽혀야(재미있어야)하고, 독서의 덕목은 간접체험을 통한 독자 개개인의 업그레이드와 의식의 공유에 따르는 휴머니즘의 확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천년의 사랑"은 괜찮은 소설이다. 독자들의 판단을 신뢰하고 이왕이면 베스트셀러를 읽자. 고전으로 남을 양서인지 여부는 세월이 판단해줄 터요, 나 자신 그 판정관이 되어봄도 즐겁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