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서울치대 졸업 후 학부 출신으로는 1호로 진주에 개원한 그는 진주 치과계 및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많은 일에 앞장섰다. 그가 진주로 내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시만 해도 의사에 비해 턱없이 낮기만 했던 치과의사에 대한 인식을 바뀌기 위한 노력이었다.
의료인이 없는 오지에서 약식 검정을 치러 진료를 했던 한지 출신들이 혼재된 진주치과의사회를 새롭게 혁신해 ‘세대교체’를 이끌고 지역 치과의사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직접 임상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무면허 치과의사 일명 머구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경찰서에 고발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번은 형을 마치고 나온 무면허자들이 한꺼번에 치과로 몰려와 항의성 시위를 벌이는 바람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제가 개원했을 때만 해도 치과를 ‘잇방’이라고 부르면서 치과의사를 의사와 동격으로 보지 않았던 시대였어요. 때문에 치과의사들이 의사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의료인으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원칙을 지켜서 행동하고 부지런히 임상을 연마하는 등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 78년 지금의 진주치과의사신협의 모태인 진주치과의사 상조회를 만든 것 역시 치과의사들의 경제적 자립도를 높이고 사회적으로도 의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치과의사들끼리 힘을 뭉쳐 경제력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에서 진주치과의사회 전 회원이 처음에는 하루에 1천원, 이후 2천원, 5천원, 1만원씩 조금씩 금액을 늘려 모금하면서 상조회를 발전시켰고 이후 16년만인 94년에는 진주치과의사신협을 창립, 번듯한 3층짜리 신협건물까지 지음으로써 그가 원하던 경제적 자립을 이끌었다.
지역의 치과의사는 물론 의사들이 의료분쟁이나 기타 법적분쟁에 휩싸였을 때에도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 해결에 앞장섰다. 그렇게 해서 얻은 별칭이 ‘진주 의료계 해결사’다.
“진주 치과계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치과의사들간 화합과 단결이 잘 이뤄졌기 때문이예요. 진주에서는 ‘우애’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진주에 개업하는 순간부터는 어느 학교 출신이냐를 떠나 모두 진주치과의사회 회원으로서 선후배가 됩니다. 그렇다 보니 지역에서 크게 문제 되거나 하는 회원이 드물고 최근 문제가 되는 불법네트워크는 아예 발붙일 엄두 조차 낼 수가 없어요.”
지역 치과의료계 일 이외에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그가 해온 일들은 너무나 방대해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진주와 관련된 일이라면 사회봉사, 문화, 예·체능 활동 등을 총망라해 그가 관여하지 않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를 소개하는데 있어 어느 하나 소홀히 다룰 수는 없지만 특히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의 이사장으로서 해온 일들은 진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엿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이사장으로서 진주 망진산 봉수대 복원, 진주걸인기생독립만세운동 재현, 진주팔경 제정, 김시민공신교서 반환운동, 진주소년운동발상지 기념비 건립 등의 사업을 통해 자칫 묻혀질 수 있었던 진주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장애인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비장애인들이 책값을 기부하는 ‘책 한권의 행복 찾기’ 릴레이 기부 운동을 전개해 지역사회는 물론 전국적인 기부 붐을 일으키며 관심을 불러 모았다.
이외에도 진주축구협회장과 고문을 역임하면서 진주축구계에 부흥을 일궜으며 지난 82년에는 ‘리영달 축구상’을 제정, 88년부터 본격적인 시상을 해오고 있다.
특히 사진을 빼고는 그를 다 설명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그는 국내외적으로 다수의 수상경력을 지닌 프로 ‘사진작가’다.
진주에 개업한 이듬해인 62년 진주사진클럽을 창설해 마니아들 사이에 사진 붐을 일으키며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온 그에게 있어 ‘진주’는 역시 빠트릴 수 없는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됐다.
주로 진주의 사람과 풍경, 그리고 전국적으로 유명한 진주의 소싸움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고 특히 진주의 소싸움 경기를 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앞장서 왔다.
그가 이처럼 ‘진주사랑’을 외치며 ‘진주 지킴이’를 자처해 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제가 50년 일평생 진주 지킴이를 자처해 온 것은 진주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는 보은의 마음 때문입니다.”
6·25 전쟁 직후 아버지를 여의고 고무신가게와 쌀가게를 꾸리면서 어렵게 6남매를 키워온 홀어머니 밑에서 공부 잘하는 둘째 아들로 성장한 그는 온 가족의 희망이었다.
치대를 선택한 것도 의사가 되면 집안을 일으킬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집안 형평이 어려워 학기 중에는 가정교사를 하고 만화를 그려가며 등록금을 충당해야만 했다.
“마지막 졸업 학기를 앞두고 더 이상 등록금을 충당할 여력이 없어 고전해야 했어요. 그때 진주 고무신조합에서 어려운 사정을 알고 마지막 등록금을 내주셨죠.”
그때부터 그는 치과의사가 되면 반드시 은혜를 입은 진주에 이를 되갚아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깊이 심었고 이를 실천해 왔다.
“제가 진주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멀티플레이어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예요. 개원 초기부터 철저하게 예약진료를 하면서 시간에 맞춰 많은 일들을 소화해 낼 수 있었거든요. 또한 지금껏 건강하게 대외적으로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내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치과의사가 될 것이고 지금의 아내와 다시 결혼할 생각입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마지막 인사를 통해 올해의 치과인상 수상의 영예를 얻기까지 일등공신은 ‘아내’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강은정 기자 human@kd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