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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y Essay 제1850번째] Dream In Purple

Relay Essay
제1850번째

 

Dream In Purple

  

큰아이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세 아이 모두 방문 미술수업을 하고 있었는데, 큰딸이 캐나다 단기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내가 대신 두 달간 수업을 받기로 했다. 그렇게 붓을 잡은지 10년….


삼남매와 병원… 그렇게 집과 일이 내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 그림은 내 마음의 위안이었고 기쁨이었다. 고흐의 꽃 그림과 세잔의 정물, 풍경, 위트릴로의 초기 작품들, 모네 등을 모작하며 집안 구석구석과 병원의 대기실에 걸어 놓았다. 어느덧 작품이 제법 모여 달력으로 만들기도 했다. 아이들의 입시와 현악 사중주 활동 등에 시간을 빼앗겨 몇년간 붓을 놓고 있던 중, 작년 가을 치의신보에 나온 공모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신문을 오려서 원장실 벽에 붙여놓고, 다시 붓을 들었다. 이제는 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한 해에 결혼하여, 큰아이 9개월 되던 91년 개원 이래 22년간 한결같이 출근하는 하얀이치과… 친구들은 자주 묻는다. 언제까지 할 거니?


삶이 언제까지고 나를 기다려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아는 나이이다.


진료실 창밖에서 병원과 함께 나이먹은 은행나무는 철 따라 싹을 틔우고 짙어졌다가는 노랗게 절정을 이루고 잎을 떨군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내 생애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지난 5월, 7박 8일동안 인도 콜카타로 떠날 기회가 주어졌다. 단기 의료선교에서 치과의사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았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 물도 전기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곳, 바닥에는 수박씨를 쏟아놓은 것처럼 파리떼가 붙어있는 그곳에 아름다운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진료 중에 신기한 듯 내 주위를 둘러싸며 흘러내릴 듯 커다란 눈망울로 지켜보던 아이들. 눈을 마주치면 웃어주던 사람들. 어설프게 칸막이 친 공간마다 몰려들던 그들을 잊을 수 없다.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나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치과의사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4월에 출품을 하고 5월 출국 전까지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핸드폰으로 연락이 온 것은 5월 14일, 콜카타에서의 진료 첫날 아침이었다. 이국 땅에서 기쁨을 남편에게 먼저 알렸다. 29일 수상작 선정이 결정된다고 하여 혹시나 하고 기다렸으나 연락이 없어 나의 욕심을 탓하던 중이었다. 30일 오후에 걸려온 전화 한통에 아이들 대학 합격에 견줄 만큼 뛸듯이 기뻤다.


Dream In Purple.


한여름날 초저녁,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물들기 시작할 무렵, 아빠는 내 손을 잡고 돗자리를 옆구리에 낀 채 마을의 공터로 마실가곤 하셨다. 풀냄새 향긋한 동산도 아니었건만 성북구 길음동 산동네의 공터는 내 유년의 기억 속에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다. 이 추억은 나를 꿈꾸는 사람으로 자라도록 한 밑거름이 되었다.


더위를 피해 삼삼오오 가족단위로 모여앉은 사람들 틈에서 아빠랑 돗자리 펴고 드러누워 살랑살랑 바람 맞으며, 별자리 구경을 했다. “저건 북극성, 저기 저건 카시오페이아. 오늘은 은하수도 있네.” 아직 글자도 깨치기 전이었던 어린 딸에게 별에 얽힌 이야기를, 그리스 로마 신화를 들려주시던 아빠. 그리고 너무 빨리 별이 되어버리신 나의 아빠.


꽃은 떨어지고 풀은 시드나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나의 젊음도 싱그런 꽃들도 다 그러하리니… 아름다운 순간들을 캔버스에 붙잡아놓고 싶었다.


꽃은 나의 삶이고 가족이고, 추억이다. 색색의 정성스런 조각보 위에 레이스를 받쳐서, 에메랄드 그린과 보랏빛 향기로, 아직도 소망을 품은 내 삶을 그려보았다.


그저 진료실 벽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를 그림을 세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기회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를 할 수 있었다는 꿈같은 현실에 감사한다. 언제나 옆에서 격려해주고 지지해 주는 남편에게, 훌쩍 커버린 사랑하는 세 아이들에게, 내게 좋은 것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혜진
부산 하얀이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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