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들을 알현하다!(하) 손 창 인손창인치과의원 원장 <지난호에 이어> 둘째날은 그 높은 토함산을 넘어 문무왕을 보러가야 한다. 추령재! 너무 높아 구름도 발길을 멈춘다는 그 고개를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아내도 걱정인 모양이다. 수년간 단련된 몸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아내를 위로했다.자는둥 마는둥 새벽 6시 우리는 필승의 각오로 이번 여행의 최대 난코스 추령에 도전한다. 지옥을 거치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나! 아무도 없는 보문단지 새벽의 공기를 자전거가 가른다. 페달밟는 발길이 경쾌하다. 보문 호수를 벗어나자마자 오르막이 시작된다. 4도의 가파른 경사, 5도 6도… 경사각이 상승한다. 저 멀리 덕동호가 보인다. 숨이 턱에 찬다. 덕동호에서 숨을 고른다. 다시 출발 뱀같이 구불거리는 추령길, 산을 돌아 내리막 오르막을 반복. 황룡교에서 다시 페달을 멈춘다. 바짝 솟은 업힐, 문무왕 보기가 이렇게 어렵나? 흐르는 땀 주체 못하고 다리에는 마비가 온다. 오직 자전거 바퀴만 보고 오른다. 멀리 구름낀 추령재 정상이 보일듯 말듯 마지막 안간힘을 다한다. 안개낀 추령터널 이정표가…, 그곳에 조그만 칡찻집! 우리는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손 창 인손창인치과의원 원장 신라왕들을 알현하다!(상) 여름휴가! 남들은 산이나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데, 나는 아내와 신라왕들을 만나러 간다.요즘 인기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의 탓도 있겠지만, 그동안 경주는 이름난 몇 곳만 다녀왔을 뿐, 테마를 잡아 2천년전의 왕들과 나 나름대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고나 할까? 또한 여행은 자연과 인생, 역사와 운동을 겸할 수 있는 자전거 라이딩이니 더 더욱 노천역사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경주를 가는 것이 옳을 것 같고, 더욱이 그 옛날 선조가 말달리던 그 곳을 현대판 애마? 내 자전거로 누빈다는 것 부터 신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7월의 마지막날 SUV에 자전거를 싣고 아침 7시에 집을 떠났다. 처음 시도하는 역사 기행! 흥분과 그 먼 일을 두 바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염려가 교차한다. 중부, 영동, 내륙, 경부고속도로 4개의 하이웨이를 거쳐 경주에 도달한다. 4시간! 천년고도가 큰 대문으로 나를 맞는다. 경주는 온통 황화 코스모스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짙은 오렌지색의 바다를 이룬 꽃들의 향연, 아내의 얼굴과 나의 얼굴은 어느새 주황색으로 변하고 눈이부신 이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은 충동이 나를 유혹한다.
할머니의 흔적과 오사카여행기(하) 정 성 훈 바텍 부산본부센터장 사천왕사사천왕사는 일본에서 처음 세워진 사찰이라고 한다.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넓은(범어사 경내의 두배는 될 것 같았다) 사찰이 있다는데 놀라웠다. 우리나라처럼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입구에 문이 하나 뿐이었다(신사 입구에 있는 문과 비슷하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웅전과 비슷한 건물 중앙에 관세음보살을 모셔놓고 그 앞에 입식 4천왕 조각이 서 있다. 범어사의 사천왕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거나 통도사처럼 애교 있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나라 무덤 앞에 서 있는 문인상이나 무인상과 비슷하였다. 납골묘 인 듯 한 비석이 촘촘히 서 있는 일본식묘지를 찾아가 보았다. 거기에는 지장보살님이 서 있었다. 승려가 뭔가를 외우고 있는데 그 옆에는 불공을 드려달라고 한 사람들이 서 있었다. 일본에서는 지장보살이 인기가 있다고 한다. 유산이나 사산, 중절을 경험한 여성들이 여기에 와서 불공을 드린다고 한다. 통계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연 30만명이 이렇게 죽어간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모르긴 해도 그 정도 숫자의 생명이 세상 빛을 보지 못할 것 같다. 특히 인공중절로 인하여 생명
할머니의 흔적과 오사카여행기(상) 정 성 훈 바텍 부산본부센터장 나에게는 어릴적부터 심심찮게 들어온 얘기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얘기로 일제시대에 청운의 꿈을 찾아 오사카로 가셔서 당신들이 겪으셨던 얘기들, 그 중에서도 오사카의 동해남부선다리 위에서 실족을 하신 할머니에 대한 얘기는 우리가족의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먼 얘기로만 여겨졌었다. 어느덧 나의 나이도 불혹에 접어든 지금 아버지께서 부쩍 오사카에 대한 얘기를 자주하셨고 결국 어쩌면 이번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가족 6명은 2009년 7월 22일부터 25일까지 3박4일간 오사카를 여행하였다. 오사카의 조선인촌, 그곳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고모를 데리고 가셨고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신곳이며, 해방직전까지 치열하게 사시다가 돌아오신 우리가족의 삶의 일부이기도 한 곳이다. 7월 22일 오후 3시 일그란데 호텔에서 Check in을 마친 후 우리는 곧바로 大淀豊崎 西通 5丁目 48번지 中津川筋 東海道線 鐵橋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내려 철교를 지난후 제법 걸으니 요도가와 강변이 나왔다. 난 만감이 뭔지 아직 잘 모른다. 마치 전설을 만나기라도 하듯, 아버지의 기억을 디딤
이 경 훈한국치과의원 원장 음식에 관한 나의 또 다른 생각 회식이나 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늘 접하게 되는 음식들이 고기나 또는 맵거나 짠 것 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 음식들은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들이 많다. 우리 조상님들이 좋아해서 그런건가?각국의 음식문화는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기후가 따듯한 남쪽일수록 음식의 부패를 막기 위해 자연스레 소금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발 더나가서 염장음식과 발효음식을 발달시켜 새로운 음식을 탄생시켰다. 한국의 발효 식품에 관한 연구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큼 우리 조상들의 지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실로 우리나라에선 발효시킬 수 없는 음식재료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재료를 발효 식품화할 수 있다. 조상들의 미각과 후각의 능력 또한 다른 민족과 차별화된다고 생각이 든다. 소 한 마리를 보자면 외국은 기껏해야 열 부위만 먹지만 우리는 안 먹는 부위가 없다 씹을 수 없는 부위라면 삶아 우려내서라도 먹는 우리민족이다 단순히 먹을 게 부족해서 그렇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것 같다. ‘한국 사람은 탁월한 미각의 유전자를 갖는 민족’이라고 한 저널리스트가 말한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하) <1769호에 이어 계속> 신 덕 재중앙치과의원 원장 얼굴을 가린 마스크 사이로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흘러내린다. 복받친 회한의 설움이 흐느낌으로 변한다. 진료를 하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여자아이에 대한 치료를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다. 노인아이가 그 많은 눈물을 왜 남모르게 흘려야만 했나?노인아이의 어렵고 못살던 어린 시절의 회한과 어린나이에 죽은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여자아이의 눈물 속에서 맑은 샘물처럼 솟아 나온 것이다. 여자아이의 해리한 모습은 노인아이 누나의 깡마른 모습이고, 여자아이의 유난히 큰 눈은 누나의 여윈 휑한 눈이고,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모든 일을 체념한 누나의 모습이다. 이 모든 것이 볼을 타고 내려오는 눈물 속에 엉켜있다. 더 이상 환자를 볼 수 없는 노인아이는 진료소를 빠져 나왔다. 진료소 밖 역시 진료소 안과 다름없이 후텁지근하고 음습한 무더위가 있다. 진료소 밖에는 안보다도 더 많은 또 다른 여자아이들이 있었다. 여기에도 누나들이 많았다. 흐르는 눈물은 밖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누나들을 보면서 더 많은 눈물이 났다.
신 덕 재중앙치과의원 원장 세월을 거슬러 간 여행(상)번 이여행은 두 아이의 여행이다.한 아이는 예순 살이 넘는 노인아이의 여행이고, 다른 여행은 열 살 된 여자아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의 여행이다. 노인아이의 여행은 이러하다.자동차 뒤꽁무니에서 나는 기름 냄새가 좋다고 정신없이 쫓아다니던 때로의 여행이고, 배고픔을 잊기 위해 담벼락의 흙을 밥인 양 먹던 때로의 여행이고, 머리에 땜통을 이고 살던 때로의 여행이고, 하얀 DDT 가루를 머리와 온 몸에 뒤집어쓰고 좋다고 뛰어 놀던 때로의 여행이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때로의 여행이다. 여자아이의 여행은 이러하다.정말로 이런 한 때가 올지 모르는 때로의 여행이고, 상상이 안 되는 때로의 여행이고, 풍족함과 여유로움이 꿈에서만 갈 수 있는 때로의 여행이고, 그리움으로 바라보는 때로의 여행이고, 무한한 희망을 간직한 채 이룰 수 있는 때로의 여행이고, 컴퓨터와 디지털 카메라를 가질 수 있는 때로의 여행이다. 그러니까 노인아이는 55년을 뒤로 거슬러 간 여행이고, 여자아이의 여행은 20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아니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르나 그래도 언젠가는 오겠지 하는 희망을 위해 앞으로 거슬러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하) 이 지 나이지나치과의원 원장 한편 치과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넉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던 재료들이 턱없이 부족하게 되었다. 외진 시골이 아니어서 여기저기 전화한 끝에 재료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탭과 진료진들은 제대로 된 체어가 아닌 덕분에 구부정한 자세로 하루 종일 일하다 보니 “허리가 끊어진 것 같아요, 슈쳐 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팀원도 있었다. 점심 먹고 나면 아무데서나 자는 팀원들이 마치 전쟁터의 전사자들같이 여기저기 쓰러진 모양새였다. 그래도 다시 진료를 시작하면 찜통 같은 곳에서 팀원들의 손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제한되고 부분적인 치료를 받으면서도 우리를 신뢰하고 불평 없이 기다리며 감사해 하는 그들을 우리는 한 사람 이라도 더 봐주려는 생각 밖에는 없는 듯 했다. 버디팀은 서로 친해지고 멘토링 하는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신종 인플루엔자 때문에 마지막에 오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해외로 아이들을 데리고 온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자기 정체성을 찾아나가면서 나라사랑도 깊어지고, 사회의 일원으로 역할을 하며, 세계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맘의 눈이 떠지는 과정에 있었다. 맹인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중) 작년에 캠프를 마치고 평가회를 하면서 내년 여름에는 아이들을 해외로 데리고 나가자고 했다. 올해는 필리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20년째 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이 있는 곳에 가서 아이들이 현지 문화 체험으로 견문도 넓히고 우리가 하는 치과 진료도 도와주면서 다른 장애우들을 돕는 법을 배우면 좋겠다는 취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을 멀리 떠난 상황에서 아이들의 내적 치유와 복음제시가 목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느 시기보다 힘든 경제위기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캠프에 참여하는 아이들과 봉사자들의 맘의 어려움과 경제적 부담은 더 커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가는 지역을 바꾸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모임 모두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던 중 어느 날 고린도후서를 묵상하면서 마게도니아 사람들이 혹독한 시련과 극심한 가난 중에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보내는 구절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의 일은 부유할 때 남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아졌다. 올 여름 버디캠프는 마닐라 시각장애인교회에서 열리게 된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2009년 버디
구순구개열 청소년 ‘버디캠프’(상) 이 지 나이지나치과의원 원장 치과의사로서 만나기 쉽지 않은 구순구개열 환자를 진료하게 된지 15년 정도 되었다. 외과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결혼과 유학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학하는 동안 교정과에서 수련을 받으면서 악안면 수술과 구순구개열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기회가 생길 때 마다 수술실이나 구순구개열 치료팀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곤 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서 이런 환자들을 접할 수 있는 대학병원에 들어갈 기회가 없게 되자 이 분야에 대한 열정을 덮어야 했다. 또한 국적문제로 인해서 개업도 할 수 없었고 오로지 취직해 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러던 중 친구를 통해 구순구개열 환자 진료에 협진 의뢰를 받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내게 다가왔고 잊혀졌던 열정이 되살아나고, 하고자 했던 꿈이 현실로 다가왔다. 구순구개열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고, 입술, 치조골, 경구개, 연구개 등이 갈라진 형태로 태어나는 선천성 악안면 기형의 한 형태다. 태어났을 때 부모가 겪는 충격과 주위사람들에게 알려질까 하는 두려움이 정리되기도 전에 수유의 어려움과 봉합수술 등의 문제
삶에 대한 감사 옥 용 주 강남차병원 양악수술클리닉 조교수 언젠가부터 혼잣말처럼 늘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건강히 하루를 시작해도 감사하고, 전날 과음으로 머리가 띵해도 애써먹은 안주를 토하지 않았기에 감사하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수영장에서 자유형을 할 때는 ‘음~파’하는 호흡법 대신 속으로 ‘사랑한다~감사하다’라고 주문을 외우는 습관도 최근에 늘었습니다. 같이 일하는 분들이 저를 믿어주어 기쁘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아 주어서 열심히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제 일터인 수술장에서는 환자가 삽관이 완료되어 무사히 수술을 시작하게 되면 감사하고 수술 중에 안정된 생징후를 보여주어 고맙습니다. 좋은 동료이자 집도하시는 선배님이 수술을 잘 끝내주셔서 감사하고 적은 봉급으로 따라와 주는 직원들에게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감사함의 리스트는 정말 감사하게도 줄지 않는 옹달샘마냥 계속해서 샘솟습니다. 제가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습니다. 중학교때 천상병 시인의 시 구절중에서 ‘인생이 잠깐 다녀가는 소풍’이라고 하는 말을 인상깊게 읽은 영향도 있을 것이고, 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