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 공연 도전과 기쁨 생각해보면 어릴 적의 난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다. 사람들 앞에 나가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겐 큰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가 그런 내 모습이 싫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떨리는 마음을 꾹 참고 노래도 하고 발표도 했다. 그리고 기왕 할거면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 이후에 돌아오는 박수와 칭찬의 보상을 즐기게 되었다. 20살 대학생이 된 후에 제일 처음 빠졌던 것은 춤이었다. 중고등학생시절 율동도 해본 적이 없던 나였기에 춤추는게 어색한 것이 당연했다. 그렇지만 무대에서 관중들의 시선을 받으며 춤을 추고 박수를 받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연습했다. 무엇을 하든 내가 하는 일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잘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 때문이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난 공부보다는 잡기에 더 소질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니까~~) 어느순간 난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그들 가운데에 있었다. 난 내 직업이 아닌 이상에는 굳이 그것의 전문가만큼 잘하고 싶은 욕심은 없다. 취미일 뿐인 잡기이므로 그냥 내 스스로 만족할 만큼
탐욕스러운 사람과 질투심 많은 사람의 우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리모컨을 안고 하루를 마감하는 일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2006년 어느 날 문득 초등생인 아이들과 화질이 좋고 더 큰 TV의 리모컨을 선점하려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리모컨을 가지고 살며 아이들에게 숙제하고 공부하라고 말하고 있는 나, 내가 생각하는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집사람과 상의한 후에 거실의 TV와 소파를 책장과 책상으로 바꾸었다. 일주일 이상을 집에 들어가면 할 일이 없어 헤매다. 책장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고 책들을 읽기 시작한지 3년여 이제는 제법 책장의 책들이 새로운 책들로 바뀌고 있다. 아이들도 나와의 리모컨 쟁탈전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자신의 방에서 아니면 거실의 책상에서 같이 책을 읽거나 숙제를 한다. 2008년은 나의 탐욕으로 인해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였다. 아니 지금도 진행되고 있지만 세월이 약이 되었다. 마음이 괴롭다고 친구, 동료를 만나 하소연하기 보다는 집에 들어가 책들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힘들 때는 “삼국지”와 “어린왕자”를 다시 읽어 본다. 최근에 읽었던 책 중 “권력의 법
김선영조선대학교 치과병원 인턴 천릿길을 향한 작은 걸음 새내기 치과의사로서 첫 발을 내딛고 정신없는 인턴생활을 하고 있던 중에 장성으로 의료봉사를 가게 되었다. 이번 봉사는 그동안 계속 행해져 오던 행사의 일부로 내과, 한방 진료, 미용 서비스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치과 검진은 올해 처음 이루어진 것인데, 처음이라 그런지 아직 틀이 잡혀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검진을 하면서 그동안 내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지식들이 다른 분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틀니를 한번 제작하면 관리를 받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았고, 틀니를 저녁까지 하루 종일 끼고 계시는 분들도 많았다. 그리고 잔존 치근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는데, 치아 동요도와 치주 상태를 보았을 때 시급한 치료가 필요한 분들 또한 많았다. 그런 분들께 정보 하나하나를 알려 드리는 것이 치과 검진의 주된 부분이었다. 어머님, 아버님들 말씀을 들어드리고 대화해 드리는 것 또한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이었다. 며칠 전 수필을 써달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당황스러웠었다. 별로 한일도 없었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몸이나 마음이
더 행복해지는 이유 ·최혜선 ·관악서울치과의원 원장 맘먹고 글 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어릴 적엔 그래도 백일장에 나가서 상도 많이 받던 문학도였는데… 원고 청탁을 받고 머릿속으로 계속 무슨 글을 써야하나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더니 역시나 마감일이 닥치니 어떻게든 글을 쓰게 된다. 최근에 건강검진을 받았다. 어디가 아파서라기보다 그냥 한번 해봐야 할 것 같아서….그런데 혈액 검사결과 특정 호르몬 수치가 정상치의 두배로 나왔다. 그래서 대학병원에 가서 두경부 MRI를 찍어봐야 한단다. 병명은 ‘뇌하수체 종양’이다. 담당의사도 별거 아니라고 했지만 인터넷 검색을 해봐도 양성 종양이라 크게 걱정할 건 없다고 한다. 수술을 혹여 하게 된다 해도 그다지 복잡한 것 같진 않고 아무튼 병은 병인데 그닥 심각할것 없는 병이다. 그래도 병원에서 처음 뇌하수체 종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가슴이 철렁하는 듯 한 느낌이 들었고 아주 많이 놀랐다.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내가 죽는다면…?별로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란 나라는 존재의 사라짐. 그 이상도 그 이하
황윤숙 한양여대 치위생과 교수 곡 우(穀雨) 참 신기하기도 하다.그동안 가물었던 긴 시간은 어디로 보냈는지 곡우(穀雨)라는 절기에 딱 맞추어 비가 온다.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경사회에서 24절기는 어찌 그리 정확한지….아무리 추워도 입춘이 되면 나무들이 움을 티우고 곡우에는 비가 온다. 이 비 그치면 볍씨를 뿌려 모를 만들고 논에 물이 들어가면 한해 먹거리를 준비할 것이다.비가 얼마나 필요하고 논에 얼마나 물이 필요한가는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오죽 간절했으면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가 배고픈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와 갈라진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라 했겠는가. 오랜만에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경쾌하기만 하다.아마도 지난 겨울 내내 가뭄과 관련된 애타는 소식, 물 아끼기 캠페인 등의 영향인 듯하다.화창해야 할 봄에 내린 비가 낙화를 촉진하겠구나. 봄옷이 하늘거리던 여자아이들 싫어하겠다보다는 이제 해갈되려나 하는 기대심리이기도 하다. 창가에서 빗소리를 듣다가 문득 1교시 시험 감독이 떠올라 혼자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떠올린다. 교육학이란 교과의 첫 번째 문제가 교육이란 단
어제 아침 안개가 짙게 끼어 화태도에 갈 수 있을까 걱정했었는데 아파트 앞섬이 어렴풋하게 보인다. 아침 일찍 진료장비를 차에 싣고 애양원진료에 나섰는데 치료실에서 아침 일찍 우리 진료팀을 기다리는 낯익은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마주잡는 손길이 따사롭다. 애양원에서 진료를 마치고 소호동 요트계류장으로 향했는데 바람이 많이 불어 풍랑주의보가 발효돼서 바다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주의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리며 준비한 도시락으로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일단 의료봉사호를 타고 돌산도 신기마을에 가서 객선으로 옮겨 타기로 했다. 화태도는 돌산도 바로 앞이니 그것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바다는 초보 선장인 나에게는 만만치 않았다. 브릿지에서 바라보니 파도가 바람에 하얀거품을 내고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들리는 묵직한 저음의 디젤엔진소리는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그대로 파도를 가르며 신기로 향했다. 신기에 거의 다다랐을때 신기 오른쪽으로 보이는 화태도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신기로 가는 것보다 화태도가 더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에 그대로 화태도로 향했다. 이러다 해양경찰에 혼나
[1444] 4월의 하루 /김효진 신구대학 치위생과 3학년 해가 채 다 뜨기도 전에 일어나 습관대로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난 버스정류장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수많은 버스들 중에서 매일 같이 720이라는 숫자만을 지루하게 기다린다. ‘오늘은 운이 없군!’ 1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을 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다.그래도 초조하진 않다. 항상 여유롭게 나오니까…. 버스에 올라 타 카드를 찍은 후 내 시선은 맨 끝에서 둘 째 줄에 위치한 창가자리를 찾는다. 병적인 집착처럼 꼭 그 창가자리에 앉아야 마음이 편했다. 나에게 그 자리는 명당이였다. 햇살 좋고 바람이 선선히 부는 날에 그 명당자리에 앉아 창문을 열고 버스가 이끄는대로 몸을 맡기면 여행을 가는 듯한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었다.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온다. 지금 내가 귀에 이어폰을 꽂기도 전에 무반주로 콧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는 이유는 오늘 그 명당자리의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느낌이 좋다. 창밖너머로 벚꽃 구경을 하며 학교에 등교를 했던 몇 일 동안은 꽃구경에 정신이 팔려 졸지 않고 뜬 눈으로 학교를 가곤 했었는데 비가 온 다음 날부터는 난 또 꾸벅
작금의 경기 불황이 의료계에 미치는 영향은 치과를 비롯하여 성형외과, 피부과 등 의료인들이 체감하는 속도는 상당히 빠르다. 그리고 회복은 또 왜 그리 느린지. 경제적 불안감으로 실제적 경기침체기에 이르기도 전에 그 낌새만으로도 환자들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하물며 지난겨울 강풍에 실려 오는 경기침체의 늪은 치과계에 있어 절정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더 중요한건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의 욕구는 저렴한 진료비로 치료 효과에 대한 기대치는 점점 높아만 가고, 그에 대한 요령을 알아내기 위해 치과를 여러 군데 다니며 꼼꼼히 살펴본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치과의사들이 경기 불황과 상관없이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은 우리의 과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요즘 같으면, 경기침체로 인해 치과 매출은 줄고, 그 매출이 기존의 지출을 따라가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에 환자들의 극단적인 저가 치료비용의 요구에 유혹받게 되고, 그러다보면 결국 우리 스스로 던져놓은 수많은 덫에 우리 자신들이 걸려들어 또 그것을 피하려 다른 방편을 간구하기 위해 각자의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부메랑 현상이 우리의 과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선생님 1시 반 환자 오셨어요. 마취해 놓을까요?" 점심 식사 후의 짧은 휴식 시간. 식곤증을 이용해 잠시 달콤하게 졸았건만 야속하게도 1분의 오차도 없이 의국의 문은 열리고 치과위생사의 사무적인 외침이 들려온다. 인턴에게 마취를 지시하고 조금 더 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처음 진료 예약을 잡을 때부터 ‘아프지 않게"를 부탁하며 울상을 짓던 환자의 표정이 생각나 미련 많은 표정으로 의국을 나와 진료실을 향한다.겁에 질려 떨고 있는 20대 후반의 여자 환자.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얘지니 그 아름다움도 더 해진 느낌이지만 한가하게 감상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천천히 심호흡해 보세요." “아프시면 언제든지 왼손을 드시면 되요. 잠시 중단 할테니까요."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요인 중 가장 큰 것은 무지에서 오는 법. 아무리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설득해 봐야 어린 아이를 사탕으로 어르는 만큼의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차라리 조금은 강압적이라도 일단 마취를 시작해서 많이 아프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시작하겠습니다." ‘삑"하는 기계음과 함께 천천히 뒤로 기울어지는 치과용 의자. 긴장이 극에 달한 환
지난해 오랜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만류하고 나섰다. 한국 의사들은 어떻게든 기회가 되면 미국으로 나가고 싶어하는데 반대로 한국으로 돌아 간다 하니 모두들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17년 전 한국을 떠날 때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개업의로서 자리를 잡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 박차고 나가는 것이냐" 고. 나는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하였던 것일까? 남들과 다른 선택에서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나?개업 7년 차,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할 즈음 교정 공부에 대한 열망과 미국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삶의 터전을 정리하고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기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뜨거운 열정과 노력 그리고 믿기 어려운 행운이 따라 주어 그토록 원하던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여기에 미국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국 치과의사 면허증과 미국 교정 전문의라는 자격증은 하나의 부산물이었다. 비록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공부였지만 이를 통해서 나는 예전과 다른 치과의사가 되는 기회를 얻었다. 한 가지만
고통과 절망 속에서내 삶의 진정한 의미와의사로서의 사명을 다했는지… 유난히도 추웠던 지난겨울을 등에 업고 춘천 거리에 삼동(三冬)을 참아온 봄이 풀포기처럼 피어나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마음속에 늘 간직하던 소나무를 상기해 본다. 삶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 계획했던 일에 게으름이 발동할 때 그 소나무는 변치 않는 푸름의 충고를 내게 주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땅인 이곳 춘천에 1978년 개원을 하였다. 의사라는 직업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지가 올해로 28년이 된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치과의사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로 주어진 삶에 보람을 느끼며 살았다. 치과의사의 권위와 권익보호를 위하여 노력하며 지역사회의 유지로서의 몫을 다 하려고도 노력했다. 시대의 흐름과 현 사회의 빠른 변화에 적응하려는 바쁜 일상의 반복은 가끔 나이를 잊게도 해 주었다. 그러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겪은 산악자전거 사고는 내게 주어진 인생의 가치관을 재발견하고 재정립하는 기회가 되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사람은 삶 가운데에 고통과 고난의 기회가 있다. 그 역경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새로운 삶을 재조명할 수 도 있고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