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것 없이도 행복하고노력하며 이루어가는지금 이순간이 즐겁다 교정치료를 하다 보면 얼굴은 예쁜데 인상이나 표정이 별로 이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얼굴은 그다지 예쁘지 않지만 표정이 살아있고 인상이 밝아 무척 예뻐 보이는 사람이 있다.또한 치료받으러 오는 중고등학생들 중엔 건네는 인사에 간단히 답례하기도 힘들어 할 만큼 지쳐있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먼저 생글생글 인사하며 눈망울이 초롱초롱 살아있는 아이들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모두 내면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리라.건강상의 이유이든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든 교정치료를 받는 것도 건강하고 예뻐져서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함일텐데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워져도 그 마음이 밝지 않으면 삶의 행복을 누리기 힘든 것 같다. 우리는 언제 행복하다 느끼게 될까?원하는 걸 가졌을 때… 원하는 걸 이루었을 때…?늘 새집에 새차를 가지고 살면서도 더 좋은 것을 찾아 헤매느라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분주한 이가 있는가 하면 낡은 집에 걸어 다니면서도 삶의 기쁨을 잃지 않는 이들도 있다.행복은 무언가를 가지거나 성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지 않을까.가진 것 없이도 행복하고 아직 이루지
연령·타는 차 ·직업도 제각각이지만자동차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끈근한 관계가 형성된다 ‘Car & Driving’.내가 속한 자동차 클럽이다. 별로 하는 일은 없지만 이 클럽의 대전·충청 지역장이다. 우수회원이기도 하고, 클럽의 온라인상의 정회원수는 3400명 정도다.우수회원은 말 그대로 우수하게 자동차란 물건을 가지고 잘 노는 능력을 지닌 연간 4만원의 회비 납부의 의무를 지니는 사람들이다. 인터넷의 활성화로 인해 여러 종류의 인터넷 동호회가 대한민국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자동차와 운전이라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난 몇 개의 자동차 동호회를 경험할 수 있었다.단일 브랜드나 단일 차종의 오너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자동차 동호회는 나와는 잘 맞지 않았다. 자동차라는 물건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여러 가지 재미없는 제약들, 예를 들자면 현대 차종의 오너들이 주가된 동호회에서는 현대 차종들의 단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힘들고, 경쟁 브랜드의 차종들의 장점을 말하기 쉽지가 않다. 이점은 벤츠나 비엠더블유와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의 동호회에서는 더 쉽게 드러난다. 이런 경쟁 구도는 가끔 재미있는 사건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각 동호회 회원들끼리
통나무로 지어진 집한지를 이용한 벽지·바닥창 밖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평상시에 여행을 좋아라하지만 결혼하고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없어진 것 같아서 여행을 계획하기가 쉽지 않은 터에 우연한 기회로 여수에 갈 일이 있어서 남편에게 하루 더 연장하자고 졸랐다. 내가 무엇을 더 보고싶어서라기보다 이제는 아이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여수는 본과 1학년 때쯤 친한 친구와 함께 일명 ‘무전여행’을 1박2일로 다녀왔던 곳이기도 하다. 단돈 만원을 들고 더운 여름에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고 잘 곳이 없어서 물어물어 얼굴도 모르는 선배님이 사시는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묵고 더위를 피하느라 창피함을 무릎 쓰고 돌산대교 옆 검문소로 들어가 음료수 한병씩 얻어마셨던 기억에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다. 그 친구는 아직도 기억하려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수는 처음 갔을 때 보다 훨씬 많이 발전해있었고 발전 중에 있었다. 엑스포준비로 여기저기 공사가 분주하였고 공항 또한 새롭게 단장을 해서 쾌적하게 바뀌어져 있었다.여수에 도착해 바다에 인접한 인근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남편이 예약했다는 ‘언덕에 바람’이라는 펜션으로 향했다.여수시가지에서 벗어나
기부문화·자원봉사는국민의식과 문화 수준을가늠하는 척도로 꼽힌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쁘게 살진 말라’는 Douglas Taft 말이 생각이 난다. 미국에 1년간 연수를 와서 나의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 본다. 우선 그동안 저에게 도움을 주신 여환호 교수님을 포함한 많은 선후배 교수님들에게 감사를 드린다.우리는 흔히 타인을 평가할 때 긍정적이거나 좋지 못한 평가를 하기가 쉽다. 항상 비판적이고 부족하고 잘못한 점을 꼬집어 말하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것 같다. 미국에 와서 대형마트에 갔더니 제일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이 도와주신 분들의 등 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May I help you?". 항상 이러한 마음으로 산다면 좋을 듯 하다. 즉 남의 죄와 허물을 들춰내기 보다는 상대방을 도와줄 생각을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비난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교제를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 모두가 중요하고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보다는 서로를 사랑하고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서
나의 애란(愛蘭)생활 15년 난 잎이 만들어내는유연함과 조화로움은자연이 만든 걸작이다 1993년부터 난실을 만들고 용돈을 쪼개 중국춘란과 한란들을 사 모으며 시작된 나의 애란생활이 올해로 15년 째 접어들었다. 내가 이렇게 난을 재배해 보기로 마음먹게 된 데는 학창시절에 우연히 맡아보았던 중국춘란의 청향(淸香)에 이끌려서이다. 세상사 모두가 그러하듯 취미생활도 한 종목에 빠져 오랫동안 지속해 나가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난 배양이란 것은 다른 취미와는 달리 쉽게 끊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난우회에 나가보면 수십 년씩 애란생활을 한 난인들이 수두룩하다. 과연 난의 어떤 매력이 난인으로 하여금 평생을 난 배양에 매달릴 수 있도록 하는가? 우선 난의 고고한 자태와 생명력이다. 난 잎이 만들어내는 유연함과 조화로움은 자연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자들께 마음이 심란할 때면 난들을 한번 쳐다보시기를 권한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침착해짐을 느끼시게 될 것이다. 이처럼 난의 고고한 자태는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난은 언뜻 보기에 가냘픈 풀처럼 보이지만 좀처럼
49재의 예불이 있던날아버님께 편지글을 적어하늘나라로 띄워 보냈다 지난 2008년 3월 15일, 아버님께서 향년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식도염으로 일주일 정도 입원하셨다 퇴원해 집으로 돌아오시던 길 심장마비로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만 숨을 거두시고 만 것이다. 입원기간 동안 매일 몇 차례씩 혈압과 맥박을 체크했으며 두 번에 걸쳐 수면내시경까지 했던 주치의마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는 이날 환자를 진료하던 중 이 급보를 전해 듣고 황급히 응급실로 달려갔으나, 이미 내가 도착했을 때는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답답하고 황망한 마음을 겨우 진정시켜 장례식장을 마련하고 주위 분들에게 연락도 취했다. 장례를 치르는 5일 내내 나는 아버지와의 지난 추억을 회상해 보며 마음속으로 영원한 이별을 준비했다. 아버지께서는 1928년 시골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여덟 살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를 여의었다. 고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대동아전쟁이 한창이던 일제치하에서 맞이한 청소년기에는 초근목피로 연
지난 5월 9일~10일,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전국 치의학도들의 축제인 육구제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육구제가 어느덧 24회를 맞이하고 있어 지금까지 축적된 노하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육구제를 기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힘든 것은 발전하는 육구제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에 고민하고 노력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2월 초에 제8기 치과대학생·치의학전문대학원생 연합의 첫 회의를 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사항은 올 한해 사업방향을 정하는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이슈는 어떤 육구제를 만들어가야 할 것 인가였다. 장시간의 논의를 통해 내린 결론은 이번 육구제는 우리들만의 축제가 아닌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축제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좀더 강화된 교외활동을 기획하고, 처음으로 여러 매체를 통한 육구제 홍보를 실시하는 것을 기획하였다. 방학기간 중에 육구제의 기본적인 큰 틀을 잡고,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한 것은 3월 개강을 하고부터 이다.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고부터는 학업과 육구제 준비를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수업중간에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일을 하고, 할증이 붙은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절대적인 준비시간
정보통신 이사직을 물러나면서6년동안 수행한 업무를 돌이켜 보며 다시 적어본다 협회 이사직을 맡아 6년을 분주히 보내고 이제 벗어나니 심리적으로 매우 홀가분하다. 협회 사무처에서 매일 같이 보내오는 수많은 팩스와 서류와 이메일과 전화가 어느 날 딱 끊기면서 공허감이 밀려오는 반면에 급격하게 일상이 변했다.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 많아지면서 개인적인 일에 다시 몰두할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편하다.나는 본시 조용한 편이어서 어느 단체에 나서질 않는 성품에 속했었다. 그런데 컴퓨터를 좀 만지고 수년 동안 치과정보통신협회 일을 좀 해본 것이 인정을 받았는지, 6년전 제25대 정재규 회장 집행부가 출범하면서 포섭(?) 당해 3년을 채우고, 이어서 직전 26대 집행부에서도 3년을 더 뛰게 되었었다. 협회 임원을 한다는 것은 명예와 함께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담당 이사의 판단이 협회의 정책과 활동에 즉각적으로 결부되는 만큼 사안에 대한 분석과 대책 마련에 극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정보통신업무는 IT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요하는 부분이 많아 개인적으로도 보건의료정보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탐구를 해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