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해 줄수 있다는 것이큰 감사이고 보람이라는 것을봉사를 통해 느낀다 한해를 새로 맞는 마음이 기대로 설렌다. 작년 한해가 매우 보람있었고 행복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같은 시절에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궁금해 하시거나 의심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즐거움에 관하여 이야기 해드리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서 치과로 출근하는 것이 즐거운 이유는 직원들과 환자들이 나를 반겨주기 때문이다. 전문가인 입장에서 보람은 나 자신을 인정받는 것인데 많은 분들이 치과의사로, 더불어 CEO로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의사의 치료계획에 동의해주고, 진료를 신뢰해 주는 것은 의료인으로서의 큰 자부심과 성취감을 갖게 하여 더욱 좋은 결과가 낳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첫째 마음을 비우는 단계 인데 바로 진료봉사이다. 작년 한해에 나와 직원들은 장애우를 위한 왕진 진료부터 무료 임플랜트 시술까지 총 273시간의 진료 봉사를 하였다. 이는 나와 치과 구성원을 성숙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휴가와 진료시간을 쪼개어 치과위생사는 장애우 무료 스케일링 봉사를 하였고, 치과기공사는 김장 담그기를 봉사했고, 후배 원장은 매주 수요
그동안 힘들었던 내 자리가이렇게 편한 곳 이란 걸 새삼 깨닫게 되다 치과일이 이렇게 편한 것 인줄 몰랐습니다. 2007년 11월 10일 KBS 클래식FM에서 주최한 ‘신작가곡부르기경연대회’에서 쟁쟁한 음악전공자 35명중 치과의사로는 처음으로 예심을 통과하고 12명에게 입상의 영광이 주어지는 결선에 오른 것입니다.결선에서 신작 가곡 ‘대관령’이라는 곡을 KBS PD로 부터 받고 일주일 후에 콩쿨을 참가하라니 무척 당황 했지만 치과의사로서 평소에 환자로 부터 마음을 비우는 일이 습관이 된 저는 금방 적응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루 하루 지나면서 내 마음은 내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불안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사를 외우는 것 조차도 왜 그리 힘들었던지 답답하게 느껴질 뿐 이었습니다.KBS 공개홀 2000석 관중은 날 무너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일주일 동안 긴장해서 목이 마르고, 몸도 마르고, 시달리고, 성대에 굳은 살이 박힐 정도로 지쳐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켜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무대에 섰는데 세상에 이렇게 크고 넓은 무대가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그나마 겨우 외웠던 가사까지 가물가물한
새해가 펼쳐졌다새로움이라는 설레임선택이라는 희망을 즐기자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에 산다. 물을 마실까 말까? 거울을 한 번 볼까? 잠시 밖에 나갈까 말까? 점심은 혹은 저녁은 무얼 먹을까? 참, 화장실은 지금 갈까? 조금 있다 갈까? ○○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지금 할까? 등등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 아니 수백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 있다. 그 순간 마음의 칼을 즉시 빼어 반짝이는 빛 사이로 빠르고 명료하게 내리쳐야 한다. 구차스럽고 번거롭지만 선택해야만 하고 그 선택의 순간이 너무도 짧아 늘 아쉽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조금 물러서 생각해 보자. 모든 것이 규정되어 있고 일률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마치 기계처럼 단순하고 또한 우스울 것이다. 막연함과 즐거운 방황 속에 삶의 즐거움이 가득 차 있다. 이것과 저것 또는 그 사이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삶의 경이로움이 숨어 있다. 선택이라고 하는 것이 늘 쉽지 않고 차라리 없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느껴지기가 다반사이지만, 선택은 축복이다. 착한 마녀의 저주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무시무시한 저주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든 적이 두 번 정도 있었다. 두
‘최소’한의 상식이훗날 만족이라는‘최대’의 결과를 낳는다 기자에서 컨설턴트로 직업을 바꿔가며 치과계에 머문 것도 벌써 3년.여전히 어디에다 명함을 내밀기에는 부족한 경력이지만, 그래도 나름 지하철 1호선부터 8호선까지, 또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제주까지 발 품 팔아가며 군데군데 뛰어다녀 본지라 ‘치과"의‘치"자 정도는 내뱉어도 되지 않을까도 싶다.그러나 항상 고민되는 것은 무언가 앞서 제시해줘야 하고, 방향을 짚어줘야 하고, 치과가 성공하는 법, 환자들을 만족시키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는 것.한숨 나는 개원가 현실에 치과 원장과 스탭들 만큼이나 더욱 큰 한숨을 짓게 되는 것은 바로 그들과 함께 치과계에 종사하며 고민하고 뛰어야 할 우리이기 때문일 것이다.물론 아무리 고민하고 뛰어다닌 들 뾰족한 해법이야 있을까마는, 그래도 무언가 내놓을 수 있다면 내놓아야 할 터이다. 지금껏 겨우 깨달은 것이라고는 치과계 역시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상식, 비용만큼의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 상식, 밥 때 거른 초과근무를 기꺼워할 사람은 없다는 상식, 한가한 직원을 좋아하는 경영자는 없다는 상식
9월초 마산에서 개업하고 있는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연히 강신율선생이 자기 치과에 들려 치료를 마치고 마산문학관에서 개최하고 있는 강신율자료전 안내서를 내 놓기에 혹시 진주의 리영달씨가 저의 아버지인데 아시느냐고 물었더니 매우 반가워하시더란다.아들가족이 추석 쇠러 오면서 마산문학관 특별기획전의 안내 엽서를 가져 왔다. 며칠 후 강신율자료전 안내장이 강신율선생으로부터 직접 부쳐 왔었다.강신율선생은 96세로 국내 사진계의 현존하는 최고령 원로작가다. 사진과 문학을 접목하여 자기의 장르를 개척한 경남사진계의 원로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 분이다. 1991년 6월중순 조광농원에서 자연풍경을 소재로 한 야외전시를 할 때 원로사진가를 위해 일부러 축하하러 간 일이 있었다. 사진은 빛의 예술 또는 발견의 예술이라 일컫습니다. 사진 속에는 개인의 삶과 정신뿐만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마산의 문화예술인 가운데 강신율(姜信律, 1913- ) 님이 있습니다. 그는 사진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대표적 사진작가로서, 사진작가협회 마산지부와 프로사진가협회 경남도지회를 창립하여 지역(寫壇)은 물론 우리나라 사진예술계를 이끌어온 원로입니다. 얼마 전 저희 마산문학관
아 버 지 / 오교창 인천강화읍 오치과의원 원장 십 수년간 ‘동거 ’를 통해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준 아버지아버지는 지금도 내안에 살아 계신다치과의사들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5점 만점에 3점 이하로 최하위권에 속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주기를 희망하는 치과의사들이 많은 것을 보면 선망받는 직업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나 역시 그렇게 치과의사가 되었고, 어느 순간 내 고향 강화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니 아버지의 페이닥터로 치과인생이 시작되었다. 본과 2학년 때였던가 치과개원을 하고 계신 아버지를 둔 개업을 앞둔 선배의 단호한 한마디가 그 후로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니?" 치과원장으로서 보다는 강화의 원로로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던 아버지와의 개원생활에 적응하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신없이 환자들이 몰려도 꿋꿋이 전치부 6-unit 브릿지를 제거하시고는 ‘Lunch!" 한마디를 던지고 나가시는 뒷모습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레진 템퍼러리 브릿지를 만들며 점심을 건너뛰어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런치"와 등가의 단어들, ‘배쓰룸", ‘바버숍?
누구나 가슴 한편 아버지 향수가…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아들놈에게 장황한 설교를 늘어놓고 나면 불만 가득한 얼굴의 그 어린 아들은 요즘 세상은 아빠 때랑 다르다고 항변합니다. 아버지에게 감히… 우리 세대의 남자들의 어린 시절엔 거의 아버지라는 존재가 경외의 대상인지라 엄마를 협상파트너로 삼아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곤 했지요. 그러나 이젠 입장이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어서 애들 방에 들어갈 때는 큰 기침을 하고 들어가야지, 조용히 들어가면 엄마인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구박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우리 끼인 아빠세대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성장하고, 민주화된 가정의 분권형 아빠로서 살아가며 가슴한편에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향수를 저마다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품고 살아가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매끄럽지 못한 글이지만 올해의 수필이라는 과분한 타이틀을 받게 된 듯싶네요. 지난 번 릴레이 수필이 나간 뒤 지인들로부터 여러 차례 전화와 인사를 받아 만족스러웠는데, 연말에 또 이렇게 좋은 선물을 주신 치의신보 임직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생업에 쫓겨 만나지 못한 지인들을 릴레이 수필을 통해 한꺼번에
정말 한 번 해보고 싶었던취미생활에 발을 담궈라생활이 달라질 것이다 4년 전 선배 한분의 제의로 치과의사로 구성된 밴드가 결성되었다. 이름은 ‘Men in Music’으로 6인조 밴드였다. 당시에는 주로 국내외의 유명 밴드의 곡들을 연주했었다. 그러다가 2년 전에 싱어가 획기적인 제안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만의 곡을 하자라는 것이었다. 뭔가 뇌리를 심하게 강타하였다. 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클럽에서의 공연은 접고 우리들만의 곡을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했고,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음악적인 견해 차이도 생겨 2명이 도중하차 하고 4인조 밴드로서 새롭게 태어났다. 이름은 ‘28s’ (이십팔 에스가 아닌 이빨스)로서 펑크록을 추구한다. 1년 반 동안의 작업 끝에 올 초에 디지털 싱글 3곡과 뮤직 비디오를 발표하였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조금 유명해졌다. 앞으로도 매년 우리들의 곡을 발표할 예정이다. 그리고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자선공연을 하면서 나름대로 밴드활동을 좋은 의미로도 승화시킬 계획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먼저 능동적으로 아빠에게 접근한다. “아빠! 발표한 노래 중에
.VBN_42585 {WORD-BREAK: break-all; font-family:굴림;font-size:9pt;line-height:normal;color:#000000;padding-left:10;padding-right:10;padding-bottom:15;padding-top:15;}.VBN_42585 p, .VBN_42585 td, .VBN_42585 li{font-family:굴림;font-size:9pt;color:#000000;TEXT-DECORATION:none;line-height:normal;margin-top:2;margin-bottom:2}.VBN_42585 font{line-height:normal;margin-top:2;margin-bottom:2}.VBN_97131{font-family:굴림; font-size:9pt;}어떤 곳을 알아간다는것이이렇게 흥미있는 일이라는 것을새삼 깨닫게 된다5박 6일간의 동경여행 시작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에서 나는 다시 한번, 항공권과 여권, 호텔재팬닷컴에서 발급 받은 신주쿠프린스호텔 예약을 확인했다. 출국 심사는 여권과 출입국 신고서를 내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JAL
유치 20개, 영구치 32개, 합해서 52개5월 둘째주를 구강보건주간으로5월을 구강보건의 달로 해마다 6월 9일이면 6세에 제일 구치가 나온다하여 치과대학에선 체육대회(육구제) 등을 개최합니다. 치과의사협회에서도 구강보건의 달이다 하여 건치 미인도 선발하고, 언론에 홍보도 합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국민적 무관심 속에 언론기관에서 의례적으로 해주던 홍보도 시들해가고 집안 잔치로만 끝나고 마는 것 같습니다.상당수 노인분들이 보철치료를 필요로 하고 원하지만, 국가에서 의료보험으로 해결하자니 부작용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그러다보니 엉뚱하게 치과의사들에게 원가를 밝히라는둥 터무니없는 요구를 듣게 되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비싼 사회적 투자가 들어간 치과의사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이 꼭 하고 싶어하고, 해주어야 할 것은 망가진 구강 환경을 극적으로 복구시켜 주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방치료야 국가에서 공공적 투자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이 부분은 국가에 맡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돈 없는 노인들을 위한 치과치료는 누가 해야하나요? 사회가 해야죠! 맨처음은 낳아주고 길러준 자식이고 다음은 치과의사협회고 그 다음은 정부이지요! 유치가 20개, 영구치가 32개 합해서 52개
산타할아버지·선물동심어린 추억을 더듬으며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한다 퇴근 무렵 이였다. “이모, 언제 놀러 올 거야?”라고 조카가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조카가 보고 싶은 마음에 언니네 집으로 곧장 퇴근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6살짜리 조카는 “이모~!”라고 부르며, 유치원에서 공부한 노트를 가지고 나에게 달려와 펼쳐 보였다. 조카의 노트에는 사진이 붙어 있었고, 그 사진 바로 아래에는 삐뚤삐뚤하게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은 날’이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다. 유치원 학습시간에 사진을 붙이고, 글 쓰는 공부를 했던 모양이다. 조카는 자기가 직접 한 것이라며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노트 속의 사진은 산타복장의 할아버지와 조카가 선물을 들고 찍은 것이었다. 내 귀여운 조카는 6살 때 자기가 착한 일을 해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갔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조카의 자랑거리를 듣고 난 후, 문득 나의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산타할아버지가 정말 있는 줄 알았다. 어렸을 적에 성탄절날 조그만 동네 교회에 가면 항상 먹을거리도 많고, 사은품도 많이 주고 해서 성탄절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다. 성탄절 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