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생각이 안들때내 맘을 느긋하고 편하게 하는저 하늘과 나무들이 고맙다 김 인 숙·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GPD 우리 병원이 있는 주변은 그린벨트 지역이다. 그래서 내가 주로 생활하는 의사 사무실에서 바라보는 창밖 세상은 요즘 초여름의 무성한 초록빛이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 멀리 의사 사무실 창문을 바라볼 때 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이다. 차분하면서 약간은 서늘한, 막 하루가 시작되려고 하는 가운데 새들과 닭들이 목청을 돋우는 그런 기운이 좋아서 아침 일찍 병원에 오려고 한다.여러 가지 변화가 졸업 후 몇 개월 사이에 있었다. 난 이제 수업시간에 번호가 불리는 학생이 아니라 ‘아무개 선생님’이 되었다. 경희대학교 동서신의학병원 로고가 찍힌 가운을 입으면서, 책임감이 느껴지던 이런 호칭이 처음엔 많이 어색했다. 국시를 보면서 6년간 배운 지식들이 한번은 정리되었다 싶었는데, 시험장을 나온 순간부터 기억은 온데간데 없는 듯하고, 진료실에서 교수님들을 observation할 때도 원내생 때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할 줄 아는 것도 거의 없는데, 알 것이라고 기대되어지는 부담감이 있었고 가끔 환자가 “앞으로 어떤
자연스레 기억을 상실해소설을 다시 읽는 것만으로도왠지 마음이 넉넉해져 글쎄,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은 여유가 없다. 아마도 상당수의 사람이 그럴 것이다. 특별히 중요하다고 느끼는 일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이리도 바쁘게 사는 것이 언제 끝나려나? 이제 나이가 50대 중반이 됐으면 조금은 여유로움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50대라? 적지도, 많지도 않은 어정쩡한 나이이다. ‘知天命’ 이라나, 나이가 50세에 이른 사람을 말하는 단어다.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그런데 나는 50중반이 되어도 하늘의 뜻을 모르겠으니 이를 어이할꼬? 누구는 아직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우리나라 인구 중 65세 이상인 사람의 비율이 벌써 7%(노령화 국가)를 지나 10%에 가까운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50대는 아직 젊은이라고 해야 하나? 노령층에서 나타나는 병중에 ‘치매’라는 병이 있다. 이 병의 특징적 현상은 기억력의 소실이다. 기억력 소실의 정도가 인간생활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최소한의 사항마저도 상당부분을 잃어버릴 수준에 이르렀을 때를 치매라고 하는가 보다. 그렇다면 치매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기억
독도와 함께 살아가며아름다운 ‘새들의 고향’으로가꿔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치과의사가 구강보건주간에 느닷없이 독도이야기를 꺼내면 매일 사람들의 입만 들여다보며 살아가는 주제에 바다 저쪽 독도로 왜 한눈을 파느냐고 탓을 듣게 되지나 않을까? 또 바라본들 제대로 보기나 하겠느냐는 핀잔을 받기 십상일 것도 같다. 하지만 인간은 워낙 기발한 까닭에 종종 엉뚱한 짓도 잘한다. 요즈음 자주 듣지만 역발상도 하고,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라며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이 조금 이상하다는 내용의 가사를 읊조리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한때 이 몸이 거나해져 기분이 조금 올라왔을때 아이들이랑 ‘이제 아이들이 다 커서 레퍼토리가 아니다.’ 식구들을 데리고 노래방에 가 마이크를 잡았다하면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2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이 애창곡이던 것을 알고나면 탓이나 핀잔보다는 애교쯤으로 보아줄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자위하며 용감히 붓을 들었지만 그래도 역시 뻑뻑해 잘 그어지지는 않는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가 뒤섞여 이것도 보이고 저것도 보여 이것도 써야겠고 저것도 써야할 것 같은데, 어떤 것끼리는 서로 중복되기도 해서 도무지 갈피잡기
내 인생의 방향에 조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늘 나를 따라준 아내에 감사 “웨이컵 데리, 웨이컵!!, 웨이컵!!!”“엄마, 아빠… 떼리베어 반물간 가요~우~”음… 또 시작이군. 화창한 5월의 일요일 아침, 난 27개월 된 아들의 호통에 겨우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제 공보의 2년차, 제주에서 맞이하는 봄날의 아침은 여유롭지도 상쾌하지도 않은 그저 육아의 시작이다. 작년 가을 정도부터 이것 저것 배우기 시작하던 민서가 이제 제법 말 같은 말도 하고 영어도 곧잘 내뱉는 걸 보면 한없이 대견스럽다가도 매일 아침마다 외쳐대는 “웨이컵 데리~~!!!” 소리를 들을 때면, 아들치고는 말이 참 빠르다는 주변의 칭찬이 무색하게만 들린다. 솔직히 가끔씩은 자명종 소리보다 두렵다. 어젯밤 열나는 민서를 재우느라 밤새 힘들었는지 아내도 아쉬운 잠을 달래며 뒤척이고 있다.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찬 민서를 보고 있자니, 저 녀석이 과연 어젯밤 열이 38~39도를 오르내리며 찡찡대던 놈이 맞는지 의문스럽다. 참 아이들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보철과 수련을 받으며 민서를 낳고 키우느라 시간과 여유에 목말랐던 터라 아내도 나도 공보의 생활의 여유로움에 큰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웬
한가지 일에 열중하다 보면본의 아니게 고집을 부리거나과열되어 사리판단을 잘못해 세상의 하고 많은 취미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물건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필자야 항상 신상기록카드의 취미란에 ‘없음’이라고 쓰는 소위 무취미를 취미로 삼고 있는 형편이지만 특별히 수집 취미에 대해서만은 관심이 많다.우표를 모으는 사람, 동전을 모으는 사람,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 찻숟갈을 모으는 사람, 주판(珠盤)을 모으는 사람 등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은 종류의 물건들을 모으는 것을 취미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꽤 많은 것 같다. 특정한 어떤 한두가지를 골라서 수집을 오래 하다 보면 그 방면의 역사적인 고찰이라든가 유래나 에피소드, 만드는 방법이나 그 값어치까지 소상하게 알게 되고 어느정도 까지는 통달하게 되는 것이다. 종종 신문이나 TV 같은데서 어떤 종류의 물건을 취미로 퍽 많이 모았노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게 되는 수가 더러 있지만 그때마다 나는 그 집념과 끈기와 노력에 그저 감탄할 뿐이다. 전국의 방방곡곡을 이 잡듯이 누비고 다니면서 갖은 파란곡절 끝에 마음에 드는 희귀한 종류의 물건을 구득했을때의 희열이 어떻겠는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겠고 어떤
왜곡된 것을 과장하고과학적 사실조차 눈감는 언론의 선정주의에 아연 요즘 소독 문제 때문에 치과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PD수첩에서 나온 방송 때문이다. 치과의사들이 진료를 할 때 손과 마스크를 제대로 소독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그 방송을 보면서 나는 1998년도에 처음으로 한센병 환자 정착촌에 병원 직원들과 함께 진료를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초여름의 싫지 않을 정도의 더위가 느껴지는 때였던 것 같다. 한센 정착촌에 기거하는 환우들이 치과 진료 시 일반인들의 시선이 좋지 않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스러워서 치과 치료 특히 보철 치료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봉사 활동차 군단위에 있는 정착촌을 처음 찾게 되었다. 두 달에 걸쳐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한센인들의 치아 상태 등을 파악한 후 치료 계획을 세웠다. 그분들의 나이도 나이지만 단기간의 방문만으로 치료를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치아상태도 좋지 않았다. 나는 최소한 식사만은 잘 하실 수 있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먹는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최소한의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음식 섭취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마을 회관의 딱딱한 의자에서 몇 개의 왕진용 가방에 준비해 간 도
청산도 청보리밭바닷바람의 깊이만큼멋드러진 보리물결 춤사위 매년 5월이면 나는 수년전 어느 소도시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막차를 놓친 그때를 떠올린다. 그 무렵 TV프로그램중 우리나라 곳곳의 숨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보인 기획물중 한 편이었는데 고화질의 화면 덕도 있겠지만, 파도물결처럼 일렁이는 청보리밭의 풍경과 바람에 비벼대는 보리울음 소리에 눈과 귀가 단숨에 홀려 그 다음해 봄까지 내내 벼르고 별러서 청산도행 소풍을 나섰다. 대구에서 부산을 거쳐 완도행 버스에, 완도에서 청산도 까지는 배로 수 십 여분, 나름대로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청산도의 선착장에 발을 내딛은 순간 그 고단함은 그 코끝에 싸하게 밀려드는 청산도의 흙과 바람과 보리밭 향기에 날아가 버렸다. 여행은 사전 지식의 확인이라고 했던가. 서편제의 배경에서 보았던 보리밭 언덕배기 사이에 나지막한 돌담으로 싸인 황톳길이 영화처럼 눈앞에 나타나고, 고화질 다큐의 시각과 청각을 매료시킨 그 화면 그대로 바닷바람에 일제히 파도타기를 하는 푸른 보리물결과 때로는 사각거리고 때로는 나지막하게 우우~하고 울어내는 보리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수답이 없어 계단식으로 만든 논밭
여자로 사는게 힘들지만 친여성적 남성이 많을수록세상은 좀 더 부드러워져 자기야, 내가 우리 문화센터 미술선생님 얘기 했니?선생님이 어제 시디를 하나 가지고 와서 우린 수업시간 내내 감미로운 음악을 들었는데 그걸 빌려와서 나도 내내 틀어놓고 듣고 있어. When I Dream이란 곡이야. 들어볼래? I can call up a man to take me to the moon…I can put my makeup on and drive the man insaneI can go to bed alone and never know his name… but when I dream, I dream of you…maybe some day you will come true… 우리 선생님은 뭐라고 해야 할까… 아주 순수하다. 젊은 사람인데 글쎄 요즘 같은 영악한 세상에서 거의 멸종된 아주 소박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우리 어릴적 시골에서 밥 먹을 때 누가 오면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된다는 그런 개념으로 사는 사람 같아. 있는만큼만 쓰고, 부자가 되거나 야망 이런 게 상대적으로 덜하고, 그 흔한 자가용도 없고, 누가 맥주라도 한잔 사면 마냥 행복하
좋은 일로 서로 경쟁하는치과의사가 되길 바라며그동안 참석해 주신분께 감사 부산여자치과의사회는 지난 1980년 전후로 대한여자치과의사회(회장 서정희) 부산지부로 출발했습니다. 당시 전국대여치모임(부산지부장 지형숙)을 부산의 구 파라다이스호텔에서 가졌고, 그 이후에는 대여치의 분열로 인해 부산여자치과의사회는 독립적으로 회원들의 유익한 정보과 화합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주정신, 임희숙, 정보형, 김희자, 이혜영, 김인숙, 이은주, 김경순, 배현주, 이향련(현 회장) 선생님들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후 2001년 연말 송년회모임에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거둬 MBC 방송국에 전달하면서 활동을 시작, 2002년 불우이웃돕기 성금전달, 2003년부산시치과의사회(회장 염정배) 후생위원회와 연계해 본격적인 봉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부산시치과의사회가 어려운 이웃에 대한 나눔을 실천하는 일들을 다방면에서 여러 가지를 해왔는데, 200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후생위원회업무를 중심에 두어 봉사사업을 하였고 재정적인 후원 및 참가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특히 말기암 환자, 치매노인 등 버려진 노인 복지 수용시설인 울산 울주군의 ‘둥지 공동
나는 묻어져 있던어릴적 꿈을 끄집어내조금씩 만지작거리기 시작 “형, 여긴 좀 밋밋한 거 같은데, 16비트로 쪼개면 어떻겠어요?"“야, 베이스도 좀 심심하다. 조금씩 움직여봐."“자, 다시 갑시다! 머리 흔들고~ 릴랙스 하고~ 원, 투, 쓰리, 포!" 2006년이 다 지나기 전에 꼭 멋진 앨범 하나 만들어보자는 굳은 결의를 했었습니다.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은 목표였지만 벌써 2006년의 절반 가까이가 지나간 지금에는 상당히 어려운 목표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는 매주 한번 이상씩 모여서 몇 시간에 걸친 맹연습을 기울이고 있긴 하지만, 생각처럼 진도가 잘 나가질 않습니다.“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손가락이 꼬이는 걸?"“아흐~ 딱 5년만 젊었어도 방방 날아다닐텐데…."“오늘은 날씨도 꿀꿀한데, 연습은 제끼고 술이나 한잔 하는 게 어때?" 때로는 술 탓도 해보고 또 때로는 나이 탓도 해보지만, 진도의 원활한 진행을 가로막는 참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연습부족!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개인 연습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밴드의 영원한 블랙홀이자 뺀질뺀질 느물느물한 말썽꾸러기….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