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 되면 이런저런 송년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요즘은 어디가나 노래방이다.우리나라 사람이 옛부터 음주가무를 즐겼다더니, 노래부르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다.나 역시 노래를 시키니 한곡은 해야 하는데… 예전에는 내가 음치라 생각하고 가능하면 노래를 피했는데, 피치 못하게 노래를 불러야 될 상황이 20년 이상 계속되니 그나마 애창곡이 몇곡 생겼다.그 중 내가 좋아하는 곡이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아군요’이다. 1980년 약관의 나이에 관악구에 치과개업을 하였는데…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신임 치과개업의로서 어려움이 많았었다.그나마 나에게 힘을 준 것은 관악구의 친절한 선배님들과 좋은 동료들이었다.동기 서너명이 같은 시기에 관악구에 개업하였고, 좋은 선배들을 만나서 개업의 애로점을 자문받고, 저녁에 만나서 술한잔하며 즐겁게 지내다보니개업의 어려움보다 좋은 동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을 지내면서 관악구 회무에 참여하여 반장, 이사, 총무, 부회장, 회장직을 맡아 치과 회무에 참여하였는데, 솔직히 치과계를 위하여 일한다는 사명감보다 좋은 선후배, 동료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으로 회무를 하였다고 생각된다.매월의 반회,
좁은 세계에 안주하지 말고다양한 사회경험으로그 세계를 벗어나도록… 얼마전 대구에 사시는 장모님이 병환으로 입원하셨다는 소식에 두 아들놈과 함께 병문안차 대구행 KTX를 타게 됐다. 집사람은 둘째놈 대학 입시 설명회 때문에 못가게 되어 오랜만에 3부자가 같은 공간에서 여러 시간동안 마주 볼 기회를 가진 것이다. 다른 집안도 그런가 모르겠으나, 딸자식이 없는 우리 집안에선 드문 시간이라 흐뭇한 기분도 들었지만 평소 대화훈련이 부족해 서로 긴 얘기는 나누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기회에 인생과 진로에 대해 도움 되는 얘기도 들려주고 아이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아버지로 좀 폼 잡아야하는데 과연 이놈들이 날 어떤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동시에 10년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님을 떠올리고, 빠른 속도로 스쳐가는 창밖 풍경을 보며 잠시 회상에 잠겼다. 어릴 적 아버님의 이미지는 시골서 자라 자수성가하신 사업가, 손주 열댓명중 유일한 손녀마저도 남자애였으면 하고 애석해하시던 보수주의자, 너무 부지런해서 살찔 틈이 없었던 강골기질의 촌부, 부모가 구해준 배필만을 강요하신 중매결혼 예찬론자 등등. 항상 긴장감을 갖고 대해야 했던 아버님에 대한 기억은 부드러움
내 오른손과 왼손을 화해시켜 맞잡고그 손을 풀어서옆 사람과 잡아 보자 고등학교 손 데생시간이었다. 나는 비대칭으로 일그러진 별로 자연스럽지 못한 손을 고생스럽게 완성하여 선생님께로 가져갔다. 못내 평가가 두려웠던 나는 변명 삼아 “선생님, 원래 제 손이 예쁘지 못해요." 힐끔 내 손을 바라보신 선생님께선 선명하게 C라고 수첩에 적으셨다. 어찌된 일인지 삼차원의 사물을 도화지에 옮겨 놓는 일에서 시각, 두뇌의 분석, 그리고 운동기관인 손은 철저히 삼박자를 놓치면서 엇박으로 기존의 시도와는 다른 결과물들을 남겨 놓곤 했다. 나는 쳐진 미술실기 점수를 그림이야기를 통해 만회해야만 했다. 봄 느낌은 옥상에서 바라본 교동의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에 내려앉는 햇살의 산란을 옅고 진한 보라색으로 그림으로써, 가을 풍경 그리기에는 경기전 고목을 훑고 지나는 바람의 길을 낙엽을 통해 그려 넣음으로써. 고1때 가족전체가 채혈을 하러 병원에 갔을 때이다. 단체 예방접종은 매일 첫번째로 하여서 마음의 시름을 일찌감치 덜었던 내가 그날은 암적색 피를 뽑는 주사기를 보는 순간 언니들 뒤로 숨고 만 것이다. 언니들 다 하고, 내 차례, 얼른 끝내고 아침밥 먹으러 가자는 말을 뒤로 하며,
나의 꿈 목록에‘장애인 구강건강’은계속 들어가 있을 것이다 “동명이인에게 잘 못 전화하신 것 아니에요?"내가 맨 처음 원고청탁(?)을 받고 전화한 기자께 했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치과대학 졸업 후 정신 없다는 보철과 수련을 마치고, 공중보건의로서 3년간 180도 달라진 생활을 하고 나서는 곧바로 올해 5월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출내기 치과의사에게 세상에 어느 누가 글을 써달라는 말을 하겠는가? 오랜 기간 환자를 봐오면서 느꼈을 만한 철학이 있을 턱이 없고, 다른 선생님들이 경험 못해봤을 만한 특이한 경험이 있을리도 만무하며, 더군다나 글솜씨 말솜씨 없기로 소문난 내가 아닌가….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니 꼭 글을 잘 쓰는 사람만 글을 쓰라는 법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7년간 각각 다른 치과의사의 위치를 거치면서 나의 치과의사로서의 꿈이 어떻게 변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겠지만, 나 또한 졸업 당시에는 치의학 발전에 이바지 하고 국민의 구강건강을 향상시켜야 하겠다는 포부를 가졌었다.하지만 전공의 시절, 나의 꿈은 곧바로 냉동실에 들어갔고 여유롭다는 공보의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것은 냉동보관중이었다. 내가 시골 보건지소
이 세상에는만남과 같은 갯수의 헤어짐이 있다는 걸 깨달아 나는 이제 너와 헤어지려고 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우리는 헤어져야하게 되었을까? 이러한 헤어짐이 오지 않았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헤어짐의 이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 이유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닿았기 때문이겠지. 어쨌건 끝난 건 끝난 거니까. 그리고 끝났으니까 끝났다고 하는 것이다.운 좋게 마음의 말을 할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순간에 나는 뭐라 말할까?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마음속에 후회와 원망이 일렁인다.“너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니?” “내가 그 때 그렇게 안했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지금 헤어지지 말고 나중에 헤어지면 안될까?”그렇게 할 말을 다 하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다.이별로 인해 다친 나의 마음이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보호받을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마음을 다잡는다. 나를 보호하려 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너를 존중하고 덜 상처 입게 하려는 자세를 연습한다.나를 떠난 후 네가 더 아름다워질 수 있기를 원한다.그래서 이렇게 말하기 위해 연습하고 노력한다.“너로 인해 내가 많이 성숙했다. ” “여
“할머니, 주름 펴고 웃으세요 웃으셔야 엔돌핀도 나오고 치아도 살려 드려요” 잠실에서 연세가 비슷한 할머니 두 분이 치료받으러 항상 같이 다니셨다. 한 분은 “원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라며 웃는 얼굴로 다니셨고, 또 한 분은 항상 불안한 표정으로 매일 경과를 확인하려 하신다. 그래서 한번은 여쭙게 되었다. “슬하에 자녀가 어떻게되세요?” 젊게 웃는 분은 딸 하나라고 하시고, 이마에 근심 걱정이라는 주름을 안고 다니시는 분은 자녀가 많다고 하신다. 그래서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 없다’는 말이 있나보다. 아마도 산다는 것은 속담과 격언 명언들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지 많은 할머니는 신경치료가 시작되자 꼭 낳게 해달라고 부탁하신다. 내려오셔서도 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탁하신다. “원장님 뽑지 않게 꼭 살려주세요.” “할머니, 이마에 주름 펴시고 웃으세요. 웃으면 엔돌핀이 나와서 치료가 더 잘됩니다.” 미국의 큰 병원에서 실험을 했는데 환자에게 코미디 프로를 보게 한 병동의 치료 효과가 훨씬 더 높게 나왔다는 이야기를 알려 드렸다. “다음 번 치료 오시는 날까지 집에서 웃고 지내셔야해요. 그래야 제가
낮고 비천한 것들에버려지고 소멸하는모든 것들에 경의를… 아침 출근 길 이었다. 하늘은 흐렸으나 지난 밤 일기 예보에 비 소식은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의 찬 공기를 즐기며 서서히 걸어 나갔다. 나는 차의 소음과 매연이 싫어 가능하면 골목길로 다닌다. 봉곡 성당 뒤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 저편에서 이편으로 바람 한 떼가 몰려왔다. 바람은 낙엽들을 일으켜 세워 우루루 길바닥을 쓸며오다가 길 한편에 처박힌 검정 비닐봉지 한 장을 툭 차서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초등학교 시절 등교 길, 차고 다니던 찌그러진 깡통 같았다. 비닐봉지를 이리저리 차고 다니던 바람은 이내 실증이 났는지 골목 한 구석에 봉지를 처박고는 휑하니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골목의 끝을 돌면 서부시장이 나타난다. 건널목을 건너서 시내 쪽으로 막 접어들 무렵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약간은 굵은 빗발이 안경에 사선을 그으며 발걸음을 막았다. 민방위 훈련 공습 경보가 울릴 때처럼 사람들은 급히 여기저기로 몸을 피했다. 병원까지 앞으로 십여 분, 맞고 가기엔 무리였다. 나도 약국 옆 처마로 몸을 피했다. 아무도 우산을 준비한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기습적인 비에 난감해
죽음을 목전에 두고살포시 미소 지을 수 있는해피엔딩의 인생 연극을 위해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또 한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이가 그리 젊지만은 않구나 하는 조금은 서운한 생각. 낙엽지는 낭만과 겨울의 월백설백천지백 어쩌구 하는 것이 성숙한 느낌이 드는 반면 왠지 싸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나의 마음.물론 연세가 있으시고 병으로 온 심신이 멍들어 계시지만 아직 부모님께서 살아계시고 나야 아직도 오십이 되려면 또 다른 많은 나날이 제법 흘러야 하는 고로 아직 새파랗게 젊다면 한 없이 젊은 나이기에 세상의 흐름을,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에 이리 저리 허둥댐을 정색을 하고 봐야 할 나이는 아니지. 보릿고개를 운운하면서 세월을 보낸 바로 다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시기에 태어났다. 집안 일에 큰 보탬까지는 아니지만 농삿일로 쟁기질 빼고는 다 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해대는 나는 부지런한 부모님의 덕으로 시골에서 한 집안에 의사가 둘이나 났다는 칭찬을 듣는 집안이었다. 허구한 날 남들은 죄다 고삿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재미나게 노는데 우리 형제들은 쉬는 법이 별로 없었다. 학교가 파하면 집안 일로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했고, 공부는
두 다리를 끌면서 완주그래도 부끄럼움을 잊은 채두 팔을 번쩍 들어올려 국제학회(EAO)에 참석 및 연구발표 차 뮌헨에 갔다가 9월 25일 이봉주선수 등이 뛴 베를린마라톤에 참가하였다. 어린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손기정선수와 히틀러치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이야기이기에, 나도 언젠가 한 번 뛰어보고자 소원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난 봄 어느 화창한날 50 유로를 결제, 인터넷으로 등록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둔재, 매사 열심히 임하기는 한다지만 남들보다 더 허덕거리며 바쁘게 지내는지라, 따로 달리기를 연습할 시간이 좀체 나지를 않았다. 어느 일요일 여름날 아침식사를 마친 뒤, 독하게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가서 한강변을 달렸는데, 달린지 약 2km정도는 되었을까 갑자기 눈꺼풀이 무겁더니 졸음이 쏟아져서 가까이에 있는 청담공원으로 기어 올라갔고, 그대로 나무벤치에 길게 드러누워 곤하게 잠들고 말았다. 이후 도무지 뛰는 것은 무리다 싶어 자전거를 가끔 타기도 했다. 대강 학회일정을 소화하고 나서, 24일 베를린으로 가는 고속철 ICE 안에서,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 Lufthansa 탑승 시부터 종류별로 마셔대기 시작한 독일 정
우리의 필요한 것을우리가 만들겠다는 신념으로몇 개의 산과 강을 건넜다 현대 치과 방사선학(dental radiology)은 의과 방사선 장비와 같은 x-ray를 사용하고 같은 film을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2차원 image, 3차원 image 부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동영상 부문에서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 왜냐하면 치과 방사선 부분에서는 fluoroscope(투시장치)라는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없는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우선 Dental fluoroscope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치과 방사선은 현재까지 오직 정지된 image만 획득할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시술 도중 의도와는 다르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예를 들어 implant 수술을 할 때 하악 신경관 가까이에 drilling을 할 경우 하악관을 천공하거나, 상악 implant를 식립할 때 상악동 천공 등, 이런 문제가 생긴 후 확인하는 영상을 획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만약 시술하는 모든 과정을 실시간 동영상으로 보면서 한다면 그 위험을 현저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Dental fluoroscope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일상 진료를
신선한 공기와 휘튼치트향에메랄드빛 호수에 비친새하얀 산봉우리의 그림자 벤쿠버소재 힐튼호텔에서 있었던 아이노보사의 엔도포어 임프란트연수회를 마치고 캘거리로 이동하여 숙소인 켄모아의 메리어트 레지던스 인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었다. 장시간의 여로에 지친 몸을 세워 내리는데 가슴깊이 스며드는 상쾌한 공기가 너무나 신선하다. 캐나다자체도 깨끗하고 오염이 안 된 나라인데 해발 1000미터 정도의 로키 산맥 인근에 있으니 그럴 수밖에…. 작년에 완공했다는 숙소가 작지만 참 깔끔하다. 발코니에는 바베큐시설도 되어있고 전자레인지며 전기인덕션레인지 등 숙식이 가능한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콘도인 셈인데 이 좋은 시설을 그냥 않쓰기 아까워서 가지고간 김치 컵라면을 냄비에 끓여먹으니 빵먹고 느글거리던 속이 편해진다. 가스를 이용하는 벽난로도 있어서 운치 있는 밤이 되었는데 어쩌냐! 마누라는 저 멀리 서울에 있고 옆 침대엔 털 수북한 남자가 코골고 자고 있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록키산의 사하촌같은 벤프로 이동하여 설파산을 곤돌라를 타고 오르는데 중턱에 걸쳐진 구름대를 뚫고 정상에 오르니 산 밑에 펼쳐진 풍광이 하얗게 쌓인 눈과 더불어 장관을 이룬다. 두꺼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