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갑’이 아닌진정한 갑족이 되기위해오늘 하루도 열심히 살았는지… 새로 이사온 아파트의 이웃들과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한달에 한번 세 부부가 만나 저녁식사와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직업과 취향이 제각각이지만 같은 신앙(가톨릭)이어서 편안한 만남이다. 또 솔직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을 배려하므로 대화를 즐기게 된다. 무릇 작은 모임일지라도 분위기메이커가 있기 마련인데 바로 최 사장님이 바로 그러하다. 이 분은 친동생이 개원한 치과의사여서, 치과계(?)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있으신 분이다. 그 분이 말씀하신 내용을 갑론을박론(?)으로 정리해 보았다.치과의사를 포함한 의사, 판, 검사등 소위 ‘사’자 직업을 가진 그룹을 ‘갑’이라 하고, 여타(?) 직업 및 환자 등을 ‘을’이라 한다. 갑은 안정된 직업으로 경제력을 지닌다. 또 사회적 인정과 존중도 쉽게 얻어, 기득권을 누리며 당연시 한다. 대접받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게다가 의사들은 진료실에서 더욱 더 강자가 된다. 갑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 보고, 우월감을 가진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누구도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가 없다. 드디어 갑도 와병이나 은퇴
대학을 졸업하고 1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치렀던 기억이 새로운데, 벌써 또 1년이 훌쩍 지나버린다. 내가 치과의사란 이름을 얻고 살아온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나보다. 가끔은 맑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는 여유를 갖으며 살아보자는 생각을 해본 지가…. 지금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환자를 대하는 것이 아닌 방사선사진을 판독하고 있지만, 불과 1년 반 전만해도 보통의 치과의사들처럼 진료를 하며 보냈던 시간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보통의 치과의사들 보다는 한 가지를 더 경험하는 것이긴 하지만, 지나왔던 시간들이 내게 어떤 의미를 남겨두었을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여유를 가져봐야겠다. 앞으로 내가 맞아야할 짧게는 10년, 그리고 그 후의 삶을…. 그 10년이 지난 후에 난 어떤 자리에 있게 될까? 물론 시간이 흘러봐야 알 수 있겠지만 가끔은 내 미래를 저울질하는 나를 보게 되면 피식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제나 편하고 쉽게, 가장 일반적으로 살고자 하는 생각들이 일상에 묶여서 타인과 그럴 듯하게 섞여가는 것을 보게 되면.짧게는 몇 년 이내에, 혹은 먼 미래에 내 자신에 대한 큰 변화가 있을 것임을 감지하면서도, 막연히 잘 될 것이라는 안위와 함께 마음을 삭히고 참아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고내가 한 치료에 A/S를 하며큰 덕을 베푸는 치과가 되고 싶다 광주의 조그마한 동네 광산구 우산동에 1992년에 대덕치과를 개설하여 12년을 하고 50m 정도 옆 건물로 옮겨 2년, 그러고 보니 14년 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다. 386세대라 명명되는 1964년 용띠, 84학번, 나이 42,치과계에서 중간 위치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한참 일할 나이 그러다 보니 이곳 저곳에서 총무를 하고 있다. 내 나이 34세, 집사람 초등교사 30세, 첫 딸 박지언 2세, 둘째 아들 재현 1세일 때1997년말에앞으로의 삶에 대해 막연히 계획을 잡아야겠다는 의무감으로 앞으로 30년에 대해 설계를 하여 보았다. 1998년부터 10년 동안은 1년 단위로, 10년이 지나면 5년 단위로, 65세까지의 앞으로 30년, 핸드피스를 잡아야할 시기에 대한 삶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살다보니 어느덧 개업 5년차. 앞으로도 과거의 시간을 기억 할 수 없는 생활이 이루어질 거라는 두려움이 앞으로의 30년에 대해 고민 하게 만들었다. 살아가면서 치과의사 직업을 가진 생활인으로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그리고 1년 뒤 무엇을
여자치과의로서우리만의 능력을 펼치는만남의 장이 성대해지길… 이제 건강도 많이 회복되었으니 같이 가자는 후배들의 권유로 대한여자치과의사회의 추계워크숍을 지난 10월 1, 2 ,3일간 금강산으로 갔다 왔다. 이렇게 쉽게 북한을 들어서니 마음이 찡해졌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 고향인 함북 회령을 늘 그리워하셨기에 남다른 감회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거다.서울서 버스로 오가며 너무도 오래 만에 뵙는 원로선배님들과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고성서 합류한 광주회원가족과 원주, 수원에서 온 후배 등 모두 39명이 참여했다.30여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대여치의 모임에 처음 갔을 때가 떠올랐다. 연세치대 1회인 나를 타 대학 출신이 처음 왔다고(그 당시는 대여치는 서울치대 출신만의 모임이었음) 대환영을 해주셨고 막내라고 귀여움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 힘이 나보다 더 좋으시고 아직도 정열적으로 진료하시는 선배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건강해져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웃으시며 후배들을 감싸셨던 김명원 선생님, 나이보다 언제나 젊게 보이시던 멋쟁이 박영숙 부회장님은 여전히 발랄하셨고, 동네반장님같이 늘 분주하시어 친밀감이 가던 김정림 회장님은 불편한 몸으로도
맘대로 되지 않으며위험도 있고 기회도 있는골프는 인생의 축소판 중학교시절 아버지에게서 어렴풋이 간단한 골프 스윙을 배웠다.오른쪽 엄지만 세우고 왼쪽 손목에 감아 스윙연습을 하면 왼쪽 팔꿈치가 쫙 펴지고 어깨 턴만으로 몸통회전이 된다는…. 골프채는 당연히 만져보지도 못하고 그냥 가끔씩 아무 생각없이 몸을 돌리곤 했다.3년 전 가을 아시아나 C.C에서 정규 홀로는 처음으로 라운딩을 했다. 선배가 잣치기를 한다며 놀려대기도 했다. 가만히 꼼짝 않고 있는 볼을 치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레슨도 받고 연습을 하면서,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달 뒤, 남서울 C.C 마지막 홀에서 긴 퍼팅이 들어가며 첫 싱글을 했다. 작년 5월에는 동기들과 스킨스게임을 하면서 홀인원도 경험했다. 아마도 어렸을 적에 무심코 어깨턴을 연습하라고 하셨던 아버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개원의에게는 환자에게 받는 스트레스 뿐 아니라 직원관리, 경영 등 신경 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만약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필드에서 맘껏 휘두르지 않았다면, 그 산적한 스트레스를 어떻게 날렸을까?언젠가는 드라이버가 맘처럼 방향성이 없어 고민하고 있을 때 차라리 비거리를 줄이고 정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학생들의 기도 물결민수 어머니의 힘 입니다 “여러 교우님, 지금 이 자리에는 생전에 처음으로 교회를 찾아오신 박민수 어머니가 어린 아들 민수가 의식을 다시 찾도록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8세인 민수는 그동안 항암 치료를 받아 오다가 1주일째 어린이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잠시 모두 박민수 어린이의 의식이 속히 회복되도록 기도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이 글은 서울대병원 교회 수요예배에서 목사님의 설교 후 하신 말씀입니다.모두들 어린 생명이 너무 안타까워 정말 열심히 합심하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자리에는 대부분이 환자와 그 가족들 60여분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으며 휠체어에 실려 온 중환자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오늘 예배는 모두 마쳤습니다”라고 하는데도 자리를 뜨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이 모습은 이 병원교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모두가 절박한 심정으로 오신 분들이기 때문이라고 할까요. 이날 저는 박민수 어머니가 누구인가 살펴보았습니다. 30살이 조금 넘었을까, 조그만 체구에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출구
동막골 풍경을 찾아빛과 그림자에 담으니일상 찌든때 스르르… “이번 달 정기촬영은 어디로 가는 거래유~.” 얼마전 사진클럽 회원들과 ‘웰컴투 동막골’ 영화를 보고 동막골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멋진 풍경을 찾아 사진에 담아보자는 회원들의 요청이 있었다. 이번달에는 동막골로 가자는 강원도 사투리를 흉내내본다. 인터넷으로 ‘동막골’을 찾아봤다. 이메일 때문에 자주쓰는 인터넷 검색창에서 ‘동막골’이라고 입력하니 영화선전 외에 이렇다할 관심을 끄는 곳이 별로 없다. 그래서 구글(google.co.kr)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찾아봤더니 무려 72만개가 있다고 한다. 그렇게나 많다니! 아무튼 영화선전을 제외하고 가볼만한 지명과 관련된 곳을 나름대로 찾아봤다. 전국 여러 곳에서 ‘동막골’이라는 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 국민관광지로 표시되어 있다. 하긴 레저문화가 발달하면서 경치가 좋다면 가만두지 않는다. 관광지 표시를 한다. 얼마나 아름다울까? 당장이라도 여기저기 달려가 사진에 담아보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가까운 곳은 어디일까. 지하철 4호선 종점인 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고개역에서 남양주로 넘어가는 길에도
분위기나 사람이 좋아서다시 가고픈 여행지처럼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다 전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무슨 축제니 잔치니 하는 것들도 가급적 가지 않고 어디를 가더라도 제일 혼잡한 시기는 피해갑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 싫거든요. 꽃구경을 갔으면 꽃을 보고 와야 하는데 차구경에 사람구경에 고생만하고 꽃은 제대로 감상도 못하는 이런 상황을 싫어합니다. ‘피크타임"이라고 하는 기간에서 살짝 앞서 다녀오거나 조금 후에 다녀오면 그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고생은 덜하죠.저번 주말은 1년에 한번 있는 친한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다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서해안을 가기로 했습니다. 요즘 서해안이 대하축제가 한참이거든요. 고생할 것 뻔히 예상했지만 ‘유붕이 자원방래"니 어떡합니까. 걱정했던 대로 그 혼잡함이 상당하더군요. 수많은 차량행렬에 어딜 가나 가득한 사람들. 일단 숙소부터가 문제가 되더군요. 한여름 더위가 지나간지 한참인데 아직도 방값이 너무 하더군요. 그나마 좀 깨끗하면서도 싸고 주인 아주머니가 너무 친절한 그런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모처럼 즐거운 저녁을 보내고 다음날 다들 대하
자신의 문화를 고수하고타인에 피해를 주지 않고낯선 사람에 친절한 나라 서울, 그 중에서도 구로구 오류동에 개원한 지 벌써 12년째이다.나는 특별한 취미가 없지만 굳이 꼽으라면 여행을 좋아한다. 새로운 곳에 가고, 경험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여행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 물론 여행은 떠나기 전날이 가장 좋다는 말이 있듯 막상 가면 힘들고 피곤한 일도 많다. 하지만 다녀와서 돌아보면 힘들었던 기억마저 여행의 추억이 된다. 그렇게 항상 동경하는 여행이지만 치과 문을 열고 있으니, 선뜻 시간을 내서 떠나기가 쉽지 않다. 올해는 딱 두 번의 여행을 다녀왔다. 첫 번째 여행지는 지난 4월에 갔던 발리다. 친구랑 둘이 꾸따의 거리를 다니며 전혀 쓸 것 같지 않은 물건들을 단지 싸다는 이유로 흥정해서 사고, 맛있는 먹을거리를 찾아다녔다. 또 거리에서 1시간도 넘게 서서 해양스포츠와 래프팅을 흥정해서 세상에서 가장 싼 가격(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으로 계약했다.다음날 용감한 친구 덕에 난생 처음 해보는 다이빙을 바다 한 가운데에서 시도하게 되었다. 산소통 매주고, 아무 연습도 없이 ‘자 이제 바다 속으로 가자’ 하는 게 아닌가! 수영도 잘못하고 평균이상으로 겁 많은 나는
너희들로 인해 엄마·아빠는사랑하는 법을 더 많이 배웠고사랑받는 기쁨도 누리고 있다 에스더와 사라가 질문들을 합니다.“왜 달은 우리를 계속 쫓아와요?" “구름은 어떻게 생기나요?" “하늘은 왜 파랗지요?" “왜 하나님은 엄마 아빠에게 우리를 늦게 보내셨을까요?" 대답하기 힘든 질문들을 받으면서도 너희들이 성장해 감을 알기에 기쁘단다.12년 만에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사랑하는 딸 에스더와 사라야!지난 2002년 7월 너희들의 첫돌을 맞이하는 감동을 지면에 쓴 첫 번째 편지에 이어 너희들이 5살이 된 2005년 10월에 두 번째 편지를 쓰게 되었구나. 너희들이 태어난 후 2년 정도는 초보 부모로서 밤잠을 설치는 등 쌍둥이를 키우는 것이 2배+알파는 힘들다는 말을 실감하며, 육체적으로는 무척 힘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너희들이 정상적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고, 엄마 아빠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인생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단다. 너희가 자라면서 보여준 밝은 미소, 재롱, 그리고 재치 있는 말들은 피로에 지친 아빠를 회복시켜주는 청량제가 되었단다. 이제는 제법 커서 가끔은 서로 다투기도
깐돌이와두목님 왕방들이여모두 건강하고유한의 그날까지 화이팅! 1978년 10월 15일 이른 아침! 전북 내장산국립공원의 유서 깊은 사찰 백양사 입구에 있는, 시골 여관 어느 방 앞에서, 여섯 살 남짓한 어린 소년 ‘깐돌이’는 “두목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하고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린다. 이 광경을 바라 본 여관 여주인은 깜짝 놀라 무슨 두목이 우리 여관에서 묵었길래 어린아이가 저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문안 인사를 드릴까 하고 몹시 겁도 나고 궁금해 했다고 한다. 이때의 주인공 여섯 살 깐돌이는 이제 대한민국의 어엿한 남아로서 훌륭하게 자라나 신성한 병역 의무를 마친 육군 헌병 예비역 병장으로 결혼을 앞두고 한참 열애중인 우리 왕방동우회의 일원인 심훈 원장의 아들, 심동호 군이며 두목(頭目)은 왕방동우회의 회장격인 육군3치과근무대 대장을 일컫는 말이다. 왕방동우회는 우리 치과계에서 유일한 같은 시기, 같은 부대에서 함께 근무한 치과군의관 출신들만의 모임으로 지난 1973년 9월15일 서울에서 첫 모임을 가진 이래 지금까지 32년간 매월 3주 수요일에 한번도 빠짐없이 꾸준히 계속하고 있으며 해외 여행이 제한받던 80년대초까지는 봄·가을 두